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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끝날 때까지 한·일 평화 위해 노력”-부산일보(07.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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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끝날 때까지 한·일 평화 위해 노력”
■ 북관대첩비 北 반환 등에 앞장 가키누마 센신 스님
귀무덤 위령비 제막식 위해 부산 찾아


   
 
“과거의 일을 해왔지만 그건 미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1990년 부산 자비사 삼중스님과 함께 한·일불교복지협회를 만든 뒤 일본측 회장직을 맡아 오면서 가해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사죄와 화해를 모색하는 활동을 펼쳐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75) 스님이 1일 부산을 찾았다.

‘이총(귀무덤) 10만6천명 혼백 환국’,’북관대첩비 한국 거쳐 북한 반환’,’ 황세손 고 이구(李玖)씨 귀국 주선’ 등….

일본의 역사왜곡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가키누마 스님은 일본 각계를 설득해 굵직굵직한 역사 현안을 해결해 온 대표적 친한파 인사.

이번 방한은 17년 만의 이총 위령비 제막식 때문.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전과를 과시하기 위해 양민들의 코와 귀를 베어가 교토에 코무덤·귀무덤을 만들었는데, 가키누마 스님은 이를 환국해 경남 사천시 용현면 소재 조명군총에 모신 바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공연히 400년 전의 만행을 부각시켜 대일 감정 악화을 초래하면 어떡하나’며 반대했지만 모든 종교계를 다니며 동의 의사를 받아낸 뒤 정부를 설득했습니다.”

지난 2005년 한-일, 남-북 사이에 드라마틱한 감동을 연출했던 북관대첩비 반환도 그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 북관대첩비는 1905년 일본군이 약탈해 일본에 가져갔다가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했던 임진왜란 당시 의병 전승비.

비석이 북한에 있던 것이어서 한국에 줄 수 없고, 북한은 국교가 없으니 통일 이후까지 기다리자는 분위기 속에 반환이 차일피일되자 한국측은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가키누마 스님은 “원래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유물인데, 지금 돌려주면 한반도의 통일에 도움된다”라는 논리를 개발해 정부를 설득했다.

또 그는 “남북 분단과 무관한 (조선 황세손) 이구 전하가 귀국할 때 함께 가져 가게 하면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당시 스님은 여권조차 없던 고종의 손자 이구씨의 귀국을 돕고 있었다.

결국 한국측 민간단체를 통해 한국 정부를 움직여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하게 하는 등 6년의 노력 끝에 북관대첩비는 100년 만인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를 거쳐 북한에 건네져 제자리를 찾게 됐다.

그러나 북관대첩비 반환은 자칫 무산될 수도 있었다. 반환을 목전에 두고 청천벽력같은 전립선과 폐암 진단을 받은 것. 하지만 ‘일을 마무리한 뒤 치료를 받겠다’며 병원을 박차고 나왔고, 끝내 비석을 한국에 보낸 뒤 수술을 받았다.

가키누마 스님을 보좌하고 있는 호리 가즈시게(堀 一重)씨는 “생사를 넘나든 수술 이후 기력이 쇠약해져 오후 5시 이후엔 거동을 못할 정도인데, 이총 위령비 제막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원기를 회복했고 너무 즐거워 하신다”고 귀띔했다.

1일 오후 부산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가키누마 스님은 편안한 생활한복 차림으로 나와 “옷이 너무 편하고, 반은 한국인이 된 느낌”이라며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생명이 남아 있는 한 한·일의 평화를 위해 일하고 싶다. 함께 힘을 모아 평화를 만들어가자”며 환한 웃음으로 합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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