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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진정 조선예술을 사랑했을까-한겨레신문(0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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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는 진정 조선예술을 사랑했을까
조선예술 구출했다는 일본 지식인
일제 무단통치 공개 비판했지만 식민지배 자체엔 눈감는 양면성 보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유종열이라는 한국식 음독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선사람보다 더 조선의 예술을 사랑하고 사멸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해냈다는 그. ‘비애의 미’ 등 21세기에도 여전히 조선예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틀과 권위로 통하는 개념을 안출해낸 독보적 존재. 현대 한국인들의 전통예술·전통미에 대한 관념의 형성에 지대한 영항을 끼치고, 따라서 그들의 일상적 미감과 역사관에도 심대한 흔적을 남긴 고유섭, 김원룡, 이한기, 김양기, 이진희, 한상일, 이규태 등 역사·예술·언론계의 실력자들이 예찬했던 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지식산업사)은 그런 야나기론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야나기의 글과 개인사, 시대적 배경을 추적하고 원문을 두루 충실하게 소개하면서 그에 관한 최근 연구성과들까지 담은 ‘야나기 읽기’의 새로운 총괄 텍스트다.


 일본 민예운동을 이끈 야나기의 조선예술 비애미론(悲哀美論)은 의외로 단순소박하다. 그는 예술 구성요소의 기조를 형태와 색체, 선으로 나누고 이를 동양3국의 미적 특질과 하나씩 연결하는 도식화를 감행한다. 중국은 강대하니 형태의 예술이고, 일본은 아름다운 자연의 혜택을 보장받고 있으니 색체의 예술이며, 조선은 길고 가느다란 곡선이 주조를 이루는 선의 예술이다. 그런데 그 선의 미는 “즐거움이 허용되지 않고 슬픔이나 괴로움이 숙명처럼 몸에 따라다니는” 역사 속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의 역사는 슬픈 운명이었다. 그들은 억압을 받으며 3천년의 세월을 거듭해왔다.”(‘조선인을 생각하다’) 오직 끝없는 침략과 착취, 억압과 고통과 비참, 슬픔, 쓸쓸함으로 점철됐으며, 그게 예술에 그대로 반영됐다는 것이다.


 조선이 수많은 외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고대정복 왕조들간의 전쟁은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끝없이 되풀이됐고 왕후장상이 아닌 민초들의 수난과 비참은 동양 3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포함한 지구상 모든 역사의 일상다반사였다. 그것을 조선이니 일본이니 하는 근대 민족국가 관념으로 파악한 것부터 넌센스다. 그리고 임진란 전까지 일본의 어느 시대가 통일신라나 고려 전기, 조선 전기보다 더 번성과 안정을 구가했단 말인가.


 게다가 야나기 자신이 말했듯이 신라·고려·조선 후기의 전란과 비참에는 일본의 책임이 크다. “오늘날 조선의 옛 예술, 즉 건축과 미술품이 거의 황폐하고 파괴되고 만 것은 대부분이 실로 가공할 왜구의 소행 때문이었다.” 그는 신라시대 건축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거의가 가공할 우리(일본) 조상들의 죄”의 결과로 봤고 “임진란의 조선 예술에 대한 일본의 부끄럽고도 무의미한 박해”를 개탄했다. 


 그리하여 조선땅의 예술품은 거의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침략자들이 남은 정수들을 휩쓸어갔다. “지난번 나라를 방문했을 때 호류지에서 놀랄 만한 옛 미술품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국보나 황실 소장품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조선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행한 쇼토쿠 태자 1300주기 마쓰리는 실로 조선에 대한 예찬이었다.”(‘조선민족 미술전람회에 즈음하여’) “조선예술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과 추모의 정을 느끼지 않는 우리의 심리상태에는 대단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보 가운데 국보로 불리는 유물들 대부분이 조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호류지의 …백제관음, …유메도노의 관음입상도 틀림없는 조선의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 일본의 국보급 유물은 조선의 미로 채워졌다고 할 수 있다.”(‘조선의 미술’)


 



 섬세한 미감을 지닌 도쿄제국대 철학과 출신의 지식인 야나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인정할만큼 양심적이었다. 그가 “그 무서운 사건”이라 했던 3·1저항운동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19년 5월부터 시작한 조선의 예술에 관한 수다한 저술은 바로 그 때문에 차별속에서 일제의 무단통치에 분노하고 자민족 역사에 절망하던 도쿄 유학생 등 식민지 조선의 지식그룹을 감동시켰다. 그들에게 야나기는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케 해주고 일제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일본인 저명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그의 한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사상과 행동은 일본 제국주의 정치사상과 공범관계에 있었다.”고 한 철학자 이토 도오루나 “야나기가 식민통치 아래 신음하는 조선민족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않고, 관념적이고 정서적 세계인 예술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것은 ‘비극의 민족’의 관심을 예술로 돌려 현실타파를 단념시키기 위한 허구이자 기만”이라고 한 옛도자기 연구가 이데가와 나오키, “야나기가 조선예술을 집중 거론한 것은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이라 한 고구마 에이지 게이오대 교수의 지적대로 야나기는 조선독립에 반대했다. 일제 식민통치야말로 왜구와 임진란을 능가하는 비극의 원천이었음에도 그는 그 구조적 모순에 눈을 감았다. 메이지유신 이후시대에 살았던 야나기는 철저히 메이지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 중심으로 재편된 동아시아근대라는 지평 속에서 과거를 바라봤다. 그에게 일본제국주의는 다소의 과오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선진(先進)이고 선(善)이었다. 그는 과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봤다. 그는 일제의 무단통치는 비판했으나 식민지배 자체는 긍정했다. 다만 총칼이 아니라 정(情)과 예술, 종교를 통해 부드러운 방법으로 피식민자들을 어루만져 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통치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을 뿐이다. 역시 ‘악어의 눈물’이었을까.


 1922년 5월 일제의 조선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미국인 알렉산더 파월의 ‘일본의 조선통치정책을 평하다’를 읽고 <세계의 비판>(37호)에 쓴 ‘비평’이란 글에서 야나기는 “이만큼 오류가 적고 공명한 평론을 본 적이 없다”면서 주장한다. “조선민족에게 다소나마 자각이 있었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 또는 일본이 넘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덕적 측면에서는 일본이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일-한합병이라는 결과에 대해서는 조선 스스로도 절반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약자는 강자를 원망하기 전에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를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사람들이여, 독립을 갈망하기 전에 인격자의 출현을 앙망하라. 위대한 과학자를 내고 위대하 예술가를 낳아라. 될 수 있는 대로 불평의 시간을 줄이고 면학의 시간을 많이 가져라.” 후일 변절한 이광수가 들고 나온 ‘민족개조론’의 원형이 여기에 있다. 


 그의 가족사가 많은 걸 얘기해줄지 모른다. 아버지 나라요시는 해군 소장 출신으로 일본군함 운요호가 강화도를 침범했을 때 해군 수로국 책임자였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야나기는 지배그룹 자녀들이 다니던 가쿠슈인(학습원)을 거쳐 도교제국대에 들어갔다. 누나 스에코의 남편 가토는 인천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했고, 가토 사후 재혼한 해군무관 다니구치는 3·1운동 때 해군 인사국장으로 조선에 증파된 병력 수송작전을 맡았으며 나중에 해군대장으로 승진했다. 여동생 지에코의 남편 이마무라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부 인사권과 경찰권을 쥐고 있던 내무국장이었다.


 야나기는 “일본이 칼로 여러분의 피부를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는 짓이 절대적 죄악이듯이 여러분들도 피를 흘리는 방법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피부 정도가 아니라 오장육부를 짖이겨 놓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양비론으로 얼버무리다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바라보는 강자들의 전형적인 시각과 다를 바 없다.


 1974년 시인 최하림씨가 야나기의 <조선과 그 예술> 번역본(<한국과 그 예술>)에 대한 해설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미술에 대하여’에서 야나기의 조선예술관을 정면으로 반박했을 때 나라 안팎에서 풍파가 일었다. 최씨는 야나기의 글들이 “말 못하는 조선인들의 상처를 달래주었음에 틀림없었다”면서도 그의 관점을 “한국인을 패배감으로 몰아넣으려는 술책과 한국의 역사를 사대로 일관한 비자주적인 역사로 몰아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책이 교묘히 버무려진 사고방식”이자 “일제의 조선정책과 그의 센티멘털한 휴머니즘이 혼합 배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야나기 철옹성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우리나라 미술품 문화재 연구와 보존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23년 전에 작고한 야나기에게 ‘부관 문화훈장’을 추서하기까지 했다. 야나기는 여전히 조선예술의 구원자이자 교사로 통하며, 심지어 그가 조선의 독립을 주창한 투사였다는 허구마저 사실마냥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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