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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받는 이들과 함께 했던 발자취 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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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정대하 기자


 












 









 






»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고 후세 타츠지의 후손 오이시 스스무(오른쪽) <일본평론사> 회장이 13일 오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서 이형량(왼쪽) 교수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독립운동가 변론한 ‘일본판 쉰들러’…건국훈장 받아
광주 등지 항일 현장 방문 “평화정신 승화시켜야”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건국훈장을 받은 고 후세 다쓰지(1880~1953)의 후손 오이시 스스무(73) <일본평론사> 회장이 13일 광주를 찾았다. 오이시 회장은 이날 오후 지인 5명과 광주학생운동 기념탑을 참배했다. 그는 “생전에 두차례나 광주를 방문했던 할아버지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것 같아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후세 변호사의 삶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를 떠올리게 한다. 나치 당원이었으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활동했던 오스카 쉰들러처럼 후세 변호사는 일본인으로서 항일운동을 지원하고 일제의 인권탄압에 맞서 싸우다 옥고를 치렀던 이색적인 인물이다. 이형량(55·일본 주오대) 교수는 “일본에 유학해 일제 강점기 조선 농민·노동운동 자료를 찾으면 항상 후세 변호사라는 이름이 나왔다”며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삶을 연구하면서 ‘아, 이런 일본인이 있었구나’ 하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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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후세 변호사는 “탄압받고 고독한 사람들의 편에 섰던” 실천가였다. 민족과 사상을 초월해 일본과 조선의 노동자·농민 등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열심이었고,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에 앞장섰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청년독립단의 변론을 시작으로 일본 왕 암살을 기도하다 체포된 박열 사건(1923년)의 변호를 맡았다. 1923년엔 광주를 방문해 ‘광주좌’라는 극장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강연을 했고, 전남 나주 궁삼면 농지수탈 사건(1926년) 때 광주를 찾았다. 1927년엔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된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두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이 과정에서 세차례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두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재일 한국인과 관련된 사건의 무료 변론을 도맡았다.

그의 묘비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어서도 민중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외손자인 오이시 회장은 “할아버지는 장남이 치안유지법에 연루돼 옥사했을 때를 제외하면 항상 의연하게 양심을 지켰다”며 “평화를 추구했던 고인의 정신이 한-일 협력 정신으로 승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러한 그의 삶은 사실 잊혀졌다가 우연히 세상에 알려졌다. 1999년 정준영(역사교훈실천운동연합 대표)씨가 일본을 방문했다가 <어느 변호사의 일생>이라는 책을 발견하면서 알려졌고, 2000년 11월 국회에서 ‘후세 선생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정부는 2004년 후세 변호사에게 항일독립투쟁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해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이시 회장 일행은 14일 나주 궁삼면을 방문한다. 후세 변호사는 동양척식회사의 토지 수탈에 항의해 싸우던 나주 농민들의 요청으로 토지반환 소송을 변호하기 위해 나주에서 사전 조사를 했다. 궁삼면 토지분쟁 기념비엔 후세 선생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형량 교수는 “당시 후세 변호사는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변호는 맡지 못했지만, 총독부의 농지수탈 행위를 합법적 사기로 규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이시 회장과 동행한 영화감독 이케다 히루는 “내년 봄부터 후세 선생의 일대기를 ‘세미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 위해 모금 운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겨레신문, 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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