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후(西湖) 가의 “한국 독립운동 성지”
(중국 문화교류, 1월호, 요약번역)
매일 아침 항저우(杭州) 시후(西湖) 가를 유유자적하게 거니는 관광객들 가운데 호수 가에 모여서 있는 나지막한 옛집들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이며, 75년 전 이곳 ‘후볜촌(湖边村)’ 23호 옛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2007년 11월의 마지막 날,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장소가 되었다. 초겨울의 햇살과 따사로운 땅의 기운이 얼룩이 진 오래된 벽과 문에 흩뿌려지고 붉은 레드카펫이 갑작스럽게 그 중 두 집 앞에 펼쳐지자 져장(浙江)성과 항저우시 지도자들과 한중 양국의 우호인사들, 학자들이 연이어 왔고 지나가던 행인들과 관광객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협소하고 낡은 후볜촌으로 몰려들어 물 한 방울 셀 틈 없이 에워싼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곳에서는 성대하면서도 간결한 행사가 열렸는데, 왕궈핑(王国平) 중국 공산당 항저우시 서기와 김신 백범기념사업회 회장이 나란히 손을 잡고 레드카펫 위로 올라선 뒤 푸른 벽돌, 칠흑같이 어두운 대문에 꽃이 새겨진 한 민가로 들어섰다. 알고 보니 이 볼품없는 나지막한 옛집이 뜻밖에도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로, 오늘 이곳에서 열리는 행사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의 개막식이었다. 이로써 상하이, 충칭(重庆), 쟈싱(嘉兴)에 이어 한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일제침략 저항, 민족독립 쟁취’의 성지가 생겨난 것이다.
져장성 외판 부처장인 루안지에(阮洁) 여사의 안내를 따라 이 평범한 2층 건물은 우리를 70여 년 전 전쟁의 세월로 데려다 주었으며 우리에게 “한국의 조상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청춘과 생명”을 되새기게 했고, 한중 양국국민이 고락과 영욕을 함께했던 그 고귀한 우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20세기 초, 제국주의 침략을 겪은 수많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세계적 범위의 민족해방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4월 11일 해외로 망명한 많은 한국지사들은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항일구국’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 임시정부는 중국의 절반 가까이를 옮겨 다니며 상하이, 쟈싱, 항저우, 창샤(长沙), 광저우(广州), 류저우(柳州), 충칭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며 중국 정부와 각지 국민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중 항저우에 머무른 기간은 한국 임시정부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탁월한 정신력으로 분열․체포 등 어려움을 이겨내 한국 독립운동사상 이정표적인 의미를 지닌 주요시기이다.
1932년 4월 29일 ‘한국의 국부’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고,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일본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요직을 살해해 한중 양국의 항일정신을 크게 고무시켰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특수 공작원들은 현상금 60만 냥을 내걸고 미친 듯이 김구 선생 일행을 수색하여 체포하려 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중국의 유명한 애국인사 추푸청(褚辅成) 선생 일가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임시정부는 비밀리에 져장 쟈싱, 하이옌(海盐), 항저우 등지로 옮겨 다니며 힘겨운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들은 때로는 쟈싱의 메이완지에(梅湾街) 79호에 기거하고 때로는 하이옌 짜이칭(栽青)별장에 은닉했으며, 심지어 장기간 동안 작은 선박에 의지해 강 위를 표류하기도 했다.
같은 해, 일본 특수 공작원들이 상하이-항저우, 상하이-닝보(宁波)를 따라 긴박하게 조여 오는 추적을 피해 한국 임시정부는 또다시 항저우로 옮겨와 우푸리(五福里) 2농 골목과 후볜촌 23호 칭타이(清泰) 제2여관 등지를 번갈아가며 활동을 전개했다. 항저우에 머무르는 동안 임시정부는 지속적으로 투쟁했으며 독립회의를 열고 독립기관지인 ‘진광(震光)’을 발행했다.
1932년~1937년까지 한국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일본 왜적의 포위를 뚫고 져장에서 완강하게 생존해 나갔으며, 임시정부의 요원들은 항저우에서 무수한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항저우 후볜촌은 그들이 한국 독립운동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증거가 되었다.
한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져장에서, 항저우에서 고군분투의 흔적을 남겼고, 한중 양국 국민들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며 외부로부터의 치욕을 함께 이겨나가는 두터운 우의를 보여 주었다. 특히 양국 항일열사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정신은 지금까지도 한중 양국국민의 우호의 강에 넘쳐흐르고 진한 샤오싱(绍兴)의 황주(黄酒)처럼 세월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새롭고 갈수록 그윽한 향이 베어 나오고 있다.
“물 한 방울의 갚진 은혜를 샘물로서 보답하다”는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 회장이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후반부를 모두 한중 우호사업에 공헌했다. 독립운동 지도자 김구 선생의 후손인 그는 중국대륙에서 한국 임시정부의 중국 내 활동의 흔적을 찾고 임시정부를 도운 중국 국민들과 그 후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으며 한중 국민들이 어려움을 함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6년 8월 한국은 대통령령으로 져장 쟈싱의 추푸청 선생이 한국 독립운동에 끼친 거대한 공헌을 인정해 그에게 한국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한국 임시정부 개관식에서 필자는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김 회장을 만났는데, 85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정하고 민첩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항저우 한국 임시정부 기념관 대외개방 행사에서 김 회장은 기념관 내에서 한걸음 뗄 때마다 마치 기억의 문을 여는 것처럼 낯익은 옛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것 같았다.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있을 때의 기억, 한국 독립운동, 자신의 일가족이 중국에서 머문 세월과 한중 국민들의 우호적인 감정 등을 얘기할 때 매우 흥분되어 보였다. 김 회장은 “중국 국민과 항저우 시민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중국이 없었다면 한국 임시정부는 없었을 것이고 한국 독립운동도 없었을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이 같은 역사를 잘 기억하고 한중 양국이 서로 의지하고 돕는 밀접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바란다.”고 말했다.
1992년 한중수교이래 양국 협력과 교류는 급속도로 발전해 각 분야에서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주상하이 한국 총영사관 총영사이자 김구 선생의 손자인 김양 총영사는 “이처럼 놀라운 발전은 그야말로 지난세기 초 양국이 제국주의 침략을 받은 어려운 세월에 함께 투쟁한 역사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김양 총영사는 2007년은 한중수교 15주년으로 항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개관은 ‘한중 우호의 해’ 행사 가운데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중요한 행사이며, “올해 이 역사적 증거는 혁명 후손들의 공동 노력으로 우리 앞에 다시 재현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한중관계 지속발전의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위안이 되는 것은 양국 정부와 국민이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겪은 역사를 잊지 않고 양국 관련인사의 적극적 추진으로, 상하이, 충칭, 쟈싱 등지의 임시정부 유적지가 연이어 수리․복원되고 양국 국민들에게 개방되어 한중 양국우호의 역사적 증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양 총영사는 항저우 한국 임시정부 기념관의 대외개방에 따라 상하이와 항저우 사이에 임시정부가 이동하며 활동한 유적지간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옛 모습을 회복한 임시정부(항저우) 유적지가 한중관계 발전과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는 교육의 성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 바란다. 어제가 없으며 오늘이 없고, 오늘이 없으면 내일이 없다.
김양 총영사는 향후 한국 젊은이들이 임시정부의 유적을 쫒아 역사의 기억을 되새기는 행사를 기획해 신세대 한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임시정부 열사들이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역사를 이해하게 하고, 한중 양국 국민관계와 항일지사들의 “어려움을 함께한” 우의를 소중히 하며 한중 세대 우호를 위해 새로운 노래가 울려 퍼지고,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신 회장과 김양 총영사와 같이 대대손손 한국 우호인사들의 불꽃이 이어져 나가고 상하이 항저우 등 한국 임시정부 기념관이 연이어 개방되고 있으며, 중국과 한국의 경제, 정치, 문화 등 교류가 깊어져가고 있는 한 양국 국민의 우호와 두터운 정은 장강(长江) 강물처럼 영원토록 넘쳐흐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