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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한 일제강점기 영욕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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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국정홍보처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코리아플러스에 실린 글이다. 글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국정홍보처 측에 감사 드린다.<편집자 주>


 


 


송석기 군산대 교수(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청은 지난해 12월 8일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1923년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건립된 이곳은 당시 경성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웅장한 근대식 건물이다. 일본인이 설계했지만, 설계 과정에 오스트리아인도 참여했다고 전해지며 시공에는 중국인 석공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또한 최근까지 성인나이트클럽으로 영업을 해왔다고 하니, 근 1세기 동안의 영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재로 값어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전라북도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군산은 북쪽으로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서천군과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전라북도 익산시, 남쪽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전라북도 김제시와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인구 26만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항구도시이다.


군산이 근대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899년 5월 1일 대한제국 정부의 속령으로 개항하면서부터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고, 뒤이어 목포, 진남포가개항된 이후 군산은 성진, 마산과 함께 6번째 개항이었다.


개항 직후 군산에는 외국인 전용주거지역이 설치됐다. 또 근대적인 항만시설과 철도, 도로 등이 건설되고, 관공서, 상가, 주거시설 등이 건립되면서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군산에 들어온 외국인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군산과 김제, 익산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경영했고 여기서 수확한 쌀은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30년대 중반 군산은 부산 다음가는 미곡 수출항으로 성장하여, 전국에서 수출되는 미곡 수출량의 25%가 이곳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군산의 20세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어  


현재 군산의 구도심에는 이때 지어졌던 건축물의 일부가 남아 일제강점기 동안 미곡 수출항으로 번성했던 당시 군산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여주고 있다. 근대도시 군산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가 군산 내항과 구도심 사이 네거리에 위치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다. 그리고 영화동과 월명동 등에 산재해 있는 일본식 주택들과 옛 나가사키(長崎) 18은행 군산지점, 동국사, 히로쓰 주택, 이영춘 주택 등이 같은 시기에 지어졌던 건물로 이들을 배경으로 ‘장군의 아들’, ‘바람의 화이터’, ‘싸움의 기술’,‘타짜’ 등의 한국영화가 군산에서 촬영되기도 하였다.


초봉이라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혼탁한 사회 현실을 묘사했던 채만식(1902∼1950)의 장편소설 ‘탁류(濁流)’에서 초봉이와 결혼했던 은행원 고태수가 근무한 ‘××은행 군산지점’이 바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이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1930년대 군산 구도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푸른 지붕을 이고 서 있는 ××은행 앞까지 가면 거기서 길은 네거리가 된다. 이 네거리에서 정주사는 바른편으로 꺾이어 동녕고개 쪽으로 해서 자기 집 ‘둔뱀이’로 가야 할 것이지만, 그러지를 않고 왼편으로 돌아 선창께로 가고 있다.”


“미두장은 군산의 심장이요, 전주통이니 본정통(本町通)이니 해안통이나 하는 폭넓은 길들은 대동맥이다. 이 대동맥 군데군데는 심장 가까이, 여러 은행들이 서로 호응하듯 옹위하고 있고 심장 바로 전후좌우에는 중매점들이 전화줄로 거미줄을 쳐놓고 앉아 있다.”


1930년대 푸른 지붕을 이고 서 있었던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건물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대표적인 금융시설로서 1923년에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한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와 이와사키 도쿠쇼(岩崎德松)가 설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산지역에서 전해지는 말로는 이 건물이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인질로 잡혀온 독일인에 의해 설계되었고 중국인 석공들에 의해 시공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인 건축가 안톤 펠러(Anton Feller)가 이 건물 설계에 관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근대 은행에서 유흥업소, 이젠 문화재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철근콘크리트와 벽돌조 2층 건물로 지붕은 함석판을 이은 모임지붕으로 처리했다. 주출입구는 정면 중앙에 두었고 측면에 부출입구를 두었다. 외벽에는 부분적으로 타일을 붙였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중앙의 웅장한 현관과 양 측면 모서리의 돌출로 대칭성과 수직성을 강조해 금융기관으로서의 권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정면과 측면에는 평아치창과 반원아치창이 설치되어 있다. 아치창 주변, 상하층 창문 사이와 외벽 중간 부분에 장식을 두었다. 물매가 급한 지붕 경사면 중간에 수평으로 긴 고창을 두어 자연 채광이 가능하도록 처리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은 해방 이후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바뀌고, 한국은행이 전주로 이전된 이후 한일은행 군산지점으로 사용되다가 유흥시설로 바뀌었다. 이때 건물의 전면부와 내부가 많은 부분 개조되었고, 1990년대에 화재로 내부가 소실된 이후 방치되어 왔다.


현재 이 건물은 군산시에서 기획하고 있는 근대테마단지 조성계획의 중심적인 건물로서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역사를 상징하는 지역사적 가치와 외관 등에서의 건축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지난해 12월 8일 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출항으로서 발전했던 군산이 해방 이후 수출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쇠락해 온 과정과 탁류에서 묘사되었던 일제강점기의 어두웠던 사회현실이 녹아 있다.


 한때 군산에서 번성했던 유흥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건물로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은 지역민에게 있어서 달갑지 않은 현실이면서 동시에 안타까운 애증의 대상이 되어 있다. 이 건물이 군산시의 계획에 따라 근대테마단지의 랜드마크로서 거듭나고 군산이 새만금과 경제자유구역 지정에 따라 다시 과거의 활력을 되찾는다면 이 건물 역시 군산시민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코리아플러스, 08.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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