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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중앙대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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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국권침탈 후 마지막으로 남은 조선왕실 가족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존재하는 궁내성의 산하기관으로 두고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 음악을 관장했던 장악원도 이왕직제가 공포된 직후인 1911년 ‘아악대’(1925년 아악부로 개칭)라는 명칭의 이왕직 산하기관으로 격하됐다. 전통음악의 계승을 담당했던 이왕직 아악부의 ‘근대적 변모’과정을 살펴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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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 우리나라 마지막 궁중악인 중의 한 사람인 김천흥 옹이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80년이 넘도록 궁중 전래 음악을 전승해 온 마지막 ‘궁중악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인생의 출발점이 바로 일제강점기 궁중음악을 담당했던 이왕직 아악부이다. 이왕직 아악부 교육생의 한사람이었던 김천홍은 당시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던 궁중악사들에게 궁중음악을 배웠다. 현재 김천흥 선생처럼 아악생으로 시작해 평생을 국악계에 몸담고 살아온 분들로는 성경린, 이창규, 김종희 선생이 있다. 이왕직 설치되면서 산하기관으로 출발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왕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징처럼 남은 왕실가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의 ‘천황’아래 존재하는 궁내성의 산하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는 조선왕조를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정부 대신 국정업무을 수행케 하기는 했으나 왕실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왕가가 가지고 있는 조선의 전통을 일본의 전통과 접목시켜 내선융화의 발판이자 모델로 삼기 위해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구차한 명맥만 남아있던 이왕직이지만 제사와 연례 등 옛 궁정의식을 소략하게 나마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식, 즉 예(禮)에는 악(樂)이 따라야 했다. 따라서 천 여명의 악인들을 거느렸던 그 옛날의 찬란했던 장악원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흉내라도 내야했던 기관이 아악부다. 일제 ‘아악’ 대신 ‘국악’이란 용어 사용 초대 아악사장에게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에는 우리 전통음악을 ‘국악’이라는 용어로 일반화해서 쓰지만 당시까지는 전혀 일반화되지 않은 특수용어였다. 애초에 ‘국악’이란 용어는 단지 몇 년간, 그것도 궁중악인의 수장에게만 쓴 용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5대 아악사장을 역임한 함화진이 수장으로 있었던 ‘대한국악원’이란 이름의 창악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의 명칭으로 쓰면서부터 일반화됐다. 이어 아악부 출신들이 낸 ‘아악부 국영안’에서 ‘국립국악원’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아악’이 ‘국악’으로 변화된 셈이다. 근대적 악사 선발 방식 도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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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왕직 아악부 제4기 양성생들의 졸업기념사진. 원안은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희(해금), 이창규(가야금) 선생의 모습이다(왼쪽). 위쪽 김종희, 이창규 선생의 연주한 작품드을 수록한 CD<가진해상>(위쪽), 이왕직 아악부 제1기 양성생들이 연주하는 모습(오른쪽). | |||||
화진이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안으로 아악을 전수 받을 교육생을 모집했다. 수업연한과 교과과정을 명시하고 지원자격을 부여하여 공개적으로 모집한 것은 아악부의 획기적인 근대적 변모였다. 교육생을 모집하기 이전 악사들은 일반적으로 세습됐다. 조선시대에는 의술이나 그림, 음식, 음악을 담당하는 전문 기관과 관청이 설치돼 있었다. 그 중 궁중의 음악과 춤을 담당한 기관이 예조에 소속된 장악원(掌樂院)이다. 장악원은 성종시대에 가장 규모가 크고 소속 인원도 많았는데, 악공 350여 명과 악생 250여 명을 비롯해 직원 등을 합치면 대략 10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때 광무개혁을 하면서 부활한 장악원 인원은 770여 명이었다. 궁중의 악인은 음악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장악원의 아동방, 장래방, 성재방에서 차례로 훈련을 받아 자연스럽게 궁중악인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러던 것이 이왕직 아악부 시절에 와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왕직 아악부는 1919년부터 모집을 시작해서 3년, 4년, 5년, 10년 만에 한 번씩 18명 정도의 아악생을 모집했다. 그들이 바로 이왕직 아악부 양성생이다. 아악생들은 우리나라 전통음악, 그 중에서도 궁중에서 연주된 음악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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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 신사에서도 연주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기원 2600년 행사에도 참여했고, 일제의 최대 어용음악조직인 조선음악협회에서 주관하는 음악회에서도 연주해야만 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왕직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저 일제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용가치에 비해 대우는 형편없었다. 게다가 일본인과 비교해 받은 부당한 대우들은 아악부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김천흥은 그의 자서전에서 “월급을 올려준다던 약속을 몇 달을 어겨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악부를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국학자 안확, 시인 이병기 촉탁으로 활동 아악부를 거쳐 간 조선인과 일본인 촉탁들도 많이 있었다. 국학자 안확은 조선의 아악을 연구하기 위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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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이왕직아악부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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