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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이왕직아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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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중앙대 겸임교수


 










아래 글은 월간지 민족21 2008년 1월호 ‘현대사 발굴’코너에 실린 것이다. 글 싣기를 허락해 준 민족21 측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일제는 국권침탈 후 마지막으로 남은 조선왕실 가족들을 일본 ‘천황’ 아래에 존재하는 궁내성의 산하기관으로 두고 관리하기 위해 이왕직을 설립했다. 이에 따라 조선왕실의 음악을 관장했던 장악원도 이왕직제가 공포된 직후인 1911년 ‘아악대’(1925년 아악부로 개칭)라는 명칭의 이왕직 산하기관으로 격하됐다. 전통음악의 계승을 담당했던 이왕직 아악부의 ‘근대적 변모’과정을 살펴본다.

글 사진 김수현 현대사연구소 상임연구원, 중앙대 겸임교수


 


지난해 8월 우리나라 마지막 궁중악인 중의 한 사람인 김천흥 옹이 향년 98세로 별세했다. 그는 13살 때부터 80년이 넘도록 궁중 전래 음악을 전승해 온 마지막 ‘궁중악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음악인생의 출발점이 바로 일제강점기 궁중음악을 담당했던 이왕직 아악부이다. 이왕직 아악부 교육생의 한사람이었던 김천홍은 당시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 있던 궁중악사들에게 궁중음악을 배웠다. 현재 김천흥 선생처럼 아악생으로 시작해 평생을 국악계에 몸담고 살아온 분들로는 성경린, 이창규, 김종희 선생이 있다.


이왕직 설치되면서 산하기관으로 출발
이들 원로 악사들이 10대 때부터 악기를 들고 매일 출퇴근을 했던 이왕직 아악부는 지금의 계동 현대빌딩에서 비원 쪽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왕직 아악부를 ‘일소당’이라고 불렀다. 이 청사는 전보다는 훨씬 조건이 좋았다고 한다. 1922년 이전까지 아악부는 당주동에 위치해 있던 봉상시(奉常司) 건물의 일부를 빌어 썼다고 한다. 봉상시 자리는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뒤쯤이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왕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후 조선왕조의 마지막 상징처럼 남은 왕실가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의 ‘천황’아래 존재하는 궁내성의 산하기관으로 만든 것이다. 일제는 조선왕조를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조선정부 대신 국정업무을 수행케 하기는 했으나 왕실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왕가가 가지고 있는 조선의 전통을 일본의 전통과 접목시켜 내선융화의 발판이자 모델로 삼기 위해 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구차한 명맥만 남아있던 이왕직이지만 제사와 연례 등 옛 궁정의식을 소략하게 나마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식, 즉 예(禮)에는 악(樂)이 따라야 했다. 따라서 천 여명의 악인들을 거느렸던 그 옛날의 찬란했던 장악원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흉내라도 내야했던 기관이 아악부다.


일제 ‘아악’ 대신 ‘국악’이란 용어 사용
아악부는 이왕직제 공포 이후인 1911년 ‘아악대’란 이름으로 이왕직 산하에 설치됐다가 1925년에 아악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통상 1910년 국권피탈 때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이 기관을 아악부라고 지칭하지만, 아악부의 수장이 처음 임명된 시점이 1907년 임을 감안하면 통감부시기부터 사실상 ‘아악부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초대 아악사장은 김종남이었다. 이때부터 1932년에 취임한 제5대 함화진까지를 역대 아악사장이라고 한다. 1907년 당시의 관보를 보면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타네타로오(目賀田鍾太郞)가 주도한 관제 개정에 따라 ‘교방사’를 장악과로 고치고 국악사장 이하 305인을 둔다는 규정이 있다. 메가타는 조선에 부임하기 몇 년 전 일본에서 ‘국악창성론’을 주창해 일본국민음악의 준말인 ‘국악’을 일으키자고 한 사람이다. 이 국악사장이 초대 아악사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종남에 이어 2대에는 함재운이, 3대에는 명완벽이, 4대에는 김영제가, 5대에는 함화진이 아악사장을 했다.


초대 아악사장에게 ‘국악사장’이라는 명칭을 썼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오늘날에는 우리 전통음악을 ‘국악’이라는 용어로 일반화해서 쓰지만 당시까지는 전혀 일반화되지 않은 특수용어였다. 애초에 ‘국악’이란 용어는 단지 몇 년간, 그것도 궁중악인의 수장에게만 쓴 용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5대 아악사장을 역임한 함화진이 수장으로 있었던 ‘대한국악원’이란 이름의 창악인들을 중심으로 한 단체의 명칭으로 쓰면서부터 일반화됐다. 이어 아악부 출신들이 낸 ‘아악부 국영안’에서 ‘국립국악원’이라는 명칭이 정착됐다. 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아악’이 ‘국악’으로 변화된 셈이다.


근대적 악사 선발 방식 도입
아악부가 설립되면서 그나마 수십 명의 옛 악사들이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나 이들만으로는 조선왕조에서 공연됐던 수많은 레퍼토리의 전통음악과 춤을 계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승은 고사하고 겨우 유지하고 있던 아악부마저 폐지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아악부를 이끌었던 김영제, 함


 



▲ 이왕직 아악부 제4기 양성생들의 졸업기념사진. 원안은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희(해금), 이창규(가야금) 선생의 모습이다(왼쪽). 위쪽 김종희, 이창규 선생의 연주한 작품드을 수록한 CD<가진해상>(위쪽), 이왕직 아악부 제1기 양성생들이 연주하는 모습(오른쪽).


화진이 이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방안으로 아악을 전수 받을 교육생을 모집했다. 수업연한과 교과과정을 명시하고 지원자격을 부여하여 공개적으로 모집한 것은 아악부의 획기적인 근대적 변모였다.


교육생을 모집하기 이전 악사들은 일반적으로 세습됐다. 조선시대에는 의술이나 그림, 음식, 음악을 담당하는 전문 기관과 관청이 설치돼 있었다. 그 중 궁중의 음악과 춤을 담당한 기관이 예조에 소속된 장악원(掌樂院)이다. 장악원은 성종시대에 가장 규모가 크고 소속 인원도 많았는데, 악공 350여 명과 악생 250여 명을 비롯해 직원 등을 합치면 대략 10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고종 때 광무개혁을 하면서 부활한 장악원 인원은 770여 명이었다. 궁중의 악인은 음악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장악원의 아동방, 장래방, 성재방에서 차례로 훈련을 받아 자연스럽게 궁중악인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러던 것이 이왕직 아악부 시절에 와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발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왕직 아악부는 1919년부터 모집을 시작해서 3년, 4년, 5년, 10년 만에 한 번씩 18명 정도의 아악생을 모집했다. 그들이 바로 이왕직 아악부 양성생이다. 아악생들은 우리나라 전통음악, 그 중에서도 궁중에서 연주된 음악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1931년 제4기 아악부 양성생을 교육하면서부터는 양성생 출신의 악사들이 아악생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전통 악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김영제, 함화진 등 몇 명의 악사만이 남게 됐기 때문이었다. 양성생들은 ‘이습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아악을 공부하고 공개연주나 방송활동 등을 통해서 아악의 명맥을 이어갔다.


아악부의 음악 연주는 제사의식과 연례의식 같은 궁중전통의 의식에서 주로 행해졌다. 뿐만 아니라 외국 손님들의 접대나 총독부 만찬에도 참여했다. 당연히 일본이 조선 각지에



▲ 이왕직 아악부 제4기 양성생들이 해금 실기학습을 하고 있다.


세운 신사에서도 연주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기원 2600년 행사에도 참여했고, 일제의 최대 어용음악조직인 조선음악협회에서 주관하는 음악회에서도 연주해야만 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왕직에 소속된 사람들은 그저 일제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용가치에 비해 대우는 형편없었다. 게다가 일본인과 비교해 받은 부당한 대우들은 아악부원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김천흥은 그의 자서전에서 “월급을 올려준다던 약속을 몇 달을 어겨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악부를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국학자 안확, 시인 이병기 촉탁으로 활동
이왕직 아악부는 옛 궁정악사들도 거의 잃고 새로운 교육생들에 의해 겨우 유지되는 상황이었지만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나 주요 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많은 외국인들이 조선아악을 듣기 위해 방문하였고 그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1921년 조선을 방문한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다. 음악학자였던 그는 조선을 방문해 15일간 아악을 조사하기 위해 아악부원들에게 음악을 연주케 했다. 당시 그는 음악으로 대동아공영권에 이바지하기 위해 동양음악을 연구하고 있었다. 훗날 그는 이러한 조사를 발판으로 중국음악을 비롯해 동양의 음악을 조사 연구해 일본에서 동양음악의 권위자가 됐다.


아악부를 거쳐 간 조선인과 일본인 촉탁들도 많이 있었다. 국학자 안확은 조선의 아악을 연구하기 위해







자청하여 1926년부터 4년간 촉탁으로 있었다. 독일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는 아악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가지고 조선의 음악과 악기들을 독일어와 영어로 소개하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특히 가곡의 대가 하규일이 촉탁이 되어 아악부원들의 정가교육을 담당했던 것은 가곡 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으로 유명한 가람 이병기도 아악부원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성악 장르의 문학적 내용을 교양시켰다.


해방 후 아악부는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일부 악사들은 해방 직후 이왕직이 구왕궁으로 개칭됨에 따라 구왕궁 아악부로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유지하려고 했다. 당시는 민속악인들이 주체가 된 ‘국악원’(현재의 국립국악원과는 다른 단체이며 대한국악원으로 명칭이 바뀌기도 함)이 참여 음악인의 규모나 활동영역 면에서 음악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국악원은 좌익계열의 조선음악가동맹과 협조해 음악활동을 했기 때문에 미군정의 좌익탄압이 강화되면서 많은 회원들이 월북을 선택했다. 안기옥, 정남희, 최옥산 등이 대표적 인물.


아악부는 국악원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여기에는 국악원의 수장이 1939년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사장을 스스로 퇴임한 함화진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1949년 국회는 국악원의 세력이 훨씬 컸음에도 아악부의 손을 들어 주어 아악부가 국립기관으로 되는 ‘아악부 국영안’을 통과시켰다. 다만 명칭은 ‘국립국악원’으로 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렇게해서 탄생한 것이 1950년 설립된 현재의 국립국악원이다. 국립국악원이 일제 하 근대의 산물인 아악부의 계승기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내선융화정책에 순응해 활동했던 이왕직 아악부와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는 단순하지 않다. 어떻게 보면 그들도 일제통치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통 음악을 계승했다는 점에서는 시대적 기여를 한 셈이지만, 해방 후 일제강점기의 활동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민족21, 08.01>













▲ 1921 조선의 아악을 연구하기 위해 방문했던 다나베 히사오의 노년 모습(위). 미군정의 좌익 탄압 와중에서 월북한 안기옥은 이후 활발한 작곡활동을 펼쳤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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