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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고 조문기 선생의 옛 부민관 앞 노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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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집례로 진행된 부민관 노제


 


영결식에 이어 오전 11시부터, 부민관 폭파의거의 현장인 중구 태평로 서울시의회 본관 앞에서 노제가 거행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의 집례로 진행된 노제에는 영결식에 참석한 300여 명의 조문객들과 시민들이 함께했다.


 







▲ 부민관폭파의거를 함께 거행한 고(故)유만수선생의 자제 유민(현재 주 러시아 한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씨가 고인을 기리는 추도사를 읽고 있다.


 


생사를 건 폭파의거 삼의사 중 한분이자 고인의 평생 동지였던 고 유만수 선생의 장남인 유민 주 러시아 공사참사관은 ‘문기 아저씨’를 목메어 부르며 절절한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는 선친과 고인이 평생 ‘미완의 독립’을 완성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모습을 회고하며 나라의 ‘의(義)’만을 구했던 고인의 정신이 부민관 현장에 모인 많은 이들 속에 살아있음을 강조했다. 시민사회를 대표하여 조사를 한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은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고인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다짐했다.(*조사 전문은 연구소 누리집 추모게시판 참조)


 







▲ 가수 손병휘 씨가 조가를 부르고 있다.


 


가수 손병휘씨는 ‘서시’와 ‘나란히 가지 않아도’ 두 곡을 노래해 고인의 삶과 보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역사의 현장인 서울시의회에는 영정과 유족, 공동장례위원장 등 소수에게만 입장이 허락되어 참석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패색이 짙어가던 일제와 친일 주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이었다. 연합국의 최후 공세를 육탄으로 막아 황국(皇國))을 지키자는 결의를 하기 위해, 친일거두 박춘금과 그가 주도한 대의당이 경성 부민관에서 아시아의 친일세력을 규합하여 1945년 7월 24일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삼의사가 이를 폭탄으로 저지시켰다. 훗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박춘금 일당은 대회이후 일정 간격을 두고 지식인들과 반일성향이 있는 동포 30만 명을 단계적으로 학살할 음모를 계획했으나 부민관폭파의거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워 주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일대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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