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오래 살아 욕되다. 구차하게 오래 살고 싶지도 않다.”
늘 이렇게 되뇌던 그였다. 그러나 또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고대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요즘은 더 살고 싶어진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는 것이라도 보고 죽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불과 6개월 남기고 끝내 그는 가버리고 말았다. 외할아버지를 통해 항일의식을 깨치다
선생은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선생의 선친은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늘 외지를 돌아다녔다. 술이나 도박도 할 줄 모르고 당시 유행하던 미두나 광산에도 손을 대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러나 그가 집에 들렀다 가면 땅문서는 하나씩 없어졌고 살림도 찌들어갔다. 어린 선생은 아버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부엌 장독 안에 감춰져 있던 ‘비(秘)’라고 붉게 도장이 찍힌 ‘조선독립소요의 진상’을 우연히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을 뿐이다. 남부럽지 않던 살림도 거덜이 나고 집마저 내놓아야 했던 어머니는 어린 선생을 친정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수원 외갓집에서 선생은 외할아버지를 통해 자신의 조국이 일본에게 강탈당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그리고 나라 없는 백성의 치욕과 서러움을 뼈저리게 겪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한창일 무렵 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선생은 전쟁터로 떠나가는 군인들을 위해 역으로 나가 양손에 일장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러야 했다. 어린 선생은 일장기를 들고 외갓집에 돌아오다 할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날 밤 대한제국의 관료를 지낸 할아버지 이조영은 선생에게 비로소 망국의 비밀을 얘기했다. 그제야 손자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일제에 대한 크나큰 분노를 느꼈다.
얼마 후 선생은 친구들과 향교 정문의 태극문양을 보러 간다. 일장기가 아닌 조선의 국기, 태극기를 알려주기 위해 향교 정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문양을 보러 간 것이다. 이 일이 학교에 알려져 선생은 주재소로 끌려갔고 할아버지가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와 치욕으로 그 자리에서 죽고만 싶었”던 어린 시절, 그는 새벽길을 밟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날의 치욕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주리라”고 맹서한다.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
1942년 15세였던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군수공장인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으로 일하던 선생은 평생의 동지 유만수 선생을 만나 친형처럼 따른다. 징용령이 실시되고 일본강관주식회사에 그대로 일하게 된 선생은 1944년 5월 유만수 선생과 모의하여 2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이끌고 일제의 민족차별에 항의하며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다. 경찰과 헌병이 포위한 가운데 벌어진 대규모 파업 후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현장을 탈출해 잠행을 거듭한다.
도쿄에서 비밀활동을 하던 서상한 아래서 비밀리에 책이나 문서를 나르는 일을 거들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단식훈련원에서 수양을 통해 혁명가로서 강인한 의지와 담력을 키웠다. 그리고 다시 암흑의 조선에 돌아왔다. 보다 더 큰 투쟁을 국내에서 전개하고 이를 기초로 중국으로 망명할 결심이었다.
1945년 7월 24일 일제의 말기적 광란이 극에 달한 때,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세력은 ‘대의당(大義黨)’을 결성, 동아시아 각 국의 친일파들을 불러들여 지금의 서울시의회 별관인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나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민족지도자를 살해할 계획 등을 추진하기 위해 열린 동아시아 친일사냥개들의 피의 제전이었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애국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대회를 무산시키고 악질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구해 시한폭탄을 만들었다. 대회 당일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엄중한 일본 헌병의 감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식장 안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해 대회를 무산시켰다. 일체의 항일운동이 지하로 들어가고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 상당수가 친일로 돌아선 시기, 한 달 후면 보고야 말 해방조차 예견하지 못하는 절망의 ‘경성’에서 제국 일본의 무한 번영을 노래하는 혼 없는 사냥개들의 사육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부민관 폭파의거이다. 부민관 폭파의거는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의열(義烈)투쟁으로 기록되거니와, 친일파의 격분 대회를 조선 민족의 격분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은 쾌거였다.
여기서 우리는 부민관 폭파의거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의 행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명 존중의 생각이 ‘테러’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시 선생과 유만수 선생은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려다, 식장에 가득 찬 조선인들을 보고 차마 청중석에 폭탄을 설치하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자를 죽여야지 조선인을 죽여서야 독립운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자의 해방, 누구나 한번 뿐인 삶의 가치를 민족의 차원에서 지키고자,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헌병이 지키고 선 무대 앞까지 가 폭탄을 설치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투쟁은 통상의 테러리즘이 아니라, 선비의 도의와 무인의 의기가 결합된 의열투쟁이라 부를 수 있다.
해방은 도적같이 찾아 왔다. 미소 군정이 실시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좌우투쟁은 격화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한민당 세력은 친일파를 다시 권력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운동을 탄압하며 단독정부의 길로 나아갔다. 선생과 그 동지들이 꿈꾸던 해방과는 너무나 달랐다. 선생은 분연히 새로운 투쟁을 준비했다.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분단을 반대하는 통일운동의 길로 나선 것이다.
분단정부 수립 전야인 1948년 6월 2일 밤, 선생은 ‘인민청년군’ 동지들과 서울 삼각산 6개 봉우리에 봉화를 올렸다. 이어 시내 여러 곳에서 ‘통일정부 수립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일제히 내걸기 위해 하산했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주인공들은 일제강점기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출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여전히 독립운동가는 ‘쫓기는 자’였고 친일파는 ‘쫓는 자’였다. 이것이 그가 맞이한 ‘해방’의 서곡이었다.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6·25전쟁이 나기 직전 선생은 석방되었다. 이후엔 선배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로, 해방 후에도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일제 때보다 더 숨 막히는 공포와 위기 속에서, 신분을 숨기고 ‘남일성’이라는 예명으로 10년간 유랑극단 배우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이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이승만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 조작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선생은 또다시 끔직한 고문을 당했다.
끝내 무혐의로 석방되었지만 고문의 후유증은 평생 가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민족의 병이 깊어지듯 후유증도 악화되었다. 팔순잔치 때,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은 선생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드렸다. 임종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지팡이 속에 숨은 선생님의 간난고초를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친일파 청산과 민족통일은 제2의 독립운동
선생은 말년에 쓴 자서전 《슬픈 조국의 노래》의 글머리에서 ‘나의 삶의 대부분은 민족의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고 술회했다. 그렇다. 그가 부산에서 유만수 선생의 중매로 장염심 여사와 결혼한 것도 결코 개인사가 아니었다. 여사 또한 단정반대 투쟁을 하면서 당당히 역사의 길을 걷다 고초를 겪은, 마땅히 역사의 한 장에 기록되어야 할 알려지지 않은 투사였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분단을 극복하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애의 결합이었다.
그러기에 분단시대 그의 가족사 또한 절대 빈곤과 경찰의 감시 그리고 냉대로 점철된 시련의 연속이었다. 외동딸마저 자신들의 손으로 거둘 수 없어 여기 저기 친척 집에 맡겨야 했다. 제집 아닌 곳에서 자는 딸을 말없이 지켜보다 ‘자신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판자촌 무허가 하숙방’으로 달려가 “온 몸의 피를 말리고 점점이 살을 도려내며” 통곡과 몸부림으로 지새운 1970년 4월 18일 밤을 선생은 평생 잊지 못했다. 독립운동가에게 가난과 박해가 대물림되고 친일세력에게는 부와 영광이 이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선생의 그날 밤은 대한민국의 암울한 밤이기도 했다.
부민관 의거 동지들 또한 마찬가지 고통을 겪었다. 유만수 선생은 중랑천 다리 밑 판잣집에서 심각한 폐병을 앓았고, 강윤국 선생 또한 이십 년 이상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민관 의거의 세 주인공 모두 떼거지가 되고 자식들은 고아가 될 운명, 그것이 독립운동의 결과였다. 누군가 이 사정을 알고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라고 권유하자 왜놈 아래서 일본군 장교를 한 사람이 주는 포상은 받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동지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두 동지의 생명과 그 가족의 최소한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 두 동지를 설득해 1977년 독립유공자로 등록했다. 그러나 자신은 끝내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2년 타의에 의해 선생의 공적서가 신고되어, 그 해 8·15경축식장에서 부득이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선생은 “민족과 선열 앞에 죄인이 되고 만 것”이라고 부끄러워 했다.
선생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이들은 세 가지 죄가 있다고 늘 말해 왔다. 남북이 분단되어 총부리를 겨누는 휴전상태인데, 끝까지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못했으니 그것이 첫 번째 죄요, 해방이 되었는데도 되려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았으니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죄이며, 그런데도 독립운동가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라고 통탄했다. 이래서야 죽어서 어찌 선배 선열들에게 얼굴을 들겠느냐고 한탄했다.
이후 선생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제2의 독립운동’으로 정하고 실천했다. 1980년대에는 광복회 관련 활동을 했으나 광복회의 실상을 알고는 실망하여 1990년 후반 이후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친일파 청산과 과거사 청산운동에 마지막 혼을 불태웠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기 전부터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일제잔재 청산에 나선 민족문제연구소 식구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칠십 넘은 노구를 이끌고 수원에서 청량리까지 왔다. 그리고 상근자들에게 점심을 사주었다. 선생이 치른 점심값은 독립유공자 연금으로 받는 돈이었다. 그 돈을 차마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은 제2의 독립운동이고 상근자들은 제2의 독립군이자 동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즐거움을 위해 선생은 보통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지하철을 몇 번이나 내려 쉬며 십 년 이상 오갔던 것이다. “나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선생은 “나는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도망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정부가 기념식 참석을 간곡하게 요청해도 그는 끝내 거부했다. 아직도 친일파가 판치는 세상에서 3·1절과 광복절은 기념일이 아니며, 자신에겐 독립투쟁의 하루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기에 선생은 3·1절이나 광복절이 오면 집회가 벌어지는 거리로 나섰다.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 참가해서는 “우리가 제대로 투쟁해서 독립을 앞당겼더라면 이런 비극과 고통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라며 그들의 손을 꼭 잡았다.
선생은 죽을 때까지 역사교과서 속의 화석화된 애국지사가 아니라, 항상 현실 속에 발 딛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처절하게 고뇌하고 열정을 다해 실천하는 활동가로 일관했다. 항일과 반독재, 친일청산으로 이어지는 그의 투쟁은, 일신의 안녕은 물론 가족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했지만, 평생을 변함 없이 진정한 자주독립국가와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한 이 시대 독립운동가의 표상이자 참 어른의 전범이었다. 그의 생전의 지론과 행동이 이를 당당하게 입증하고 있다.
“나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제2의 독립운동이며 민족사의 당면과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머물지 않을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일제 잔재 청산만이 아니라, 조국통일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그러기에 나는 죽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멈출 수 없다. 그러다 죽으면, 나는 선배선열들에게 보고할 것이다. 죽는 날까지 독립투쟁을 하다 왔노라고.”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2월 10일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했다.<민족21, 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