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헝가리 동영상과 안익태 이해의 새 키워드’

869

































 


 


송병욱(독일 훔볼트대학원 재학)


 










몇 해 전부터 작곡가 안익태에 관한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온 송병욱 씨(독일 훔볼트 대학원)가 ‘헝가리 동영상과 안익태 이해의 새 키워드’란 제목의 소고를 연구소로 보내와 그 전문을 싣는다. 좋은 글을 보내준 송병욱 씨에게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살려주세요. 저는 당신의 군사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기도 없고 이 나팔뿐이랍니다,” 포로로 잡힌 나팔수가 왕에게 애원했다. “그렇다면 정녕 네 목숨을 앗아야겠다. 나팔을 불어 우리를 공격하도록 독려한 놈이 바로 너였구나!” (이솝 우화)


1. 또 다른 ‘안익태 동영상’


헝가리 국립 영상물 보관소에는 분류 번호 ‘1941년 11월’ 하에, 만주국 동영상과는 다른 내용의 안익태 관련 영상물(이하 동영상) 한 가지가 보존되어 있다(국학연구소의 조준희 연구원이 알려주었다). 이 동영상에는《강천성악》의 일부가 담겨 있는데, 동영상 속의 작품은《에텐라쿠》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강천성악》과《에텐라쿠》가 하나의 곡으로서 전자는 후자의 해방 이후 버전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안익태 본인에 의한《강천성악》곡해설은 진실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이 거짓 진술에 관해 안익태는 미필적 고의 이상의 고의를 갖고 있었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2. 동영상 속 연주회와 연주곡의 정체


이 동영상은 1분 길이로서, “일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의 Pesti Vigado 연주회”라는 자막과 더불어 시작한다. 동영상은, 안익태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어떤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무대 뒷면에는 헝가리와 일본 국기가 늘어뜨려져 있고, 카메라는 지휘자와 연주자뿐 아니라 갤러리에 있는 일단의 일본인에게도 포커스를 맞추기도 한다. 동영상 속에서 두드러지게 들리는 선율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헝가리 동영상’ 속 <에텐라쿠> 선율


 


이 부분은《강천성악》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1]. 특징적 요소들(상성 선율, 그에 대응하는 저음선율 형태, 타악기 군의 리듬 패턴, 음량 점증을 거친 후 거대 음량의 투티로 주제선율을 명하는 구상 등)이 이를 입증한다.《강천성악》클라이맥스를 가지고 있다면 이 곡은 마땅히《강천성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을 텐데 확인해 본 결과 곡의 제목은《에텐라쿠》였다.   이 동영상에 관해 소장 기관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동영상의 분류 번호(‘1941년 11월’)와 동영상 속 선율이 일본 궁중음악 에텐라쿠(이하 ‘에텐라쿠’)의 선율인 점에착안하여 – 즉, 연주회는 1941년 11월 또는 그와 근접한 이전 시점에서 열렸을 것이고 그 레퍼토리 중에 ‘에텐라쿠’와 관련있는 작품이 포함되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 헝가리 국립도서관에 측에 1941년 9월부터 11월까지의 지역 일간지를 검색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안익태의 연주회로서 이 기간 동안 확인 가능한 경우는 오직 1941년 10월 10일의 Pesti Vigado 홀 연주회(이하 ’10/10 연주회)뿐이라는 회신을 받았다. 동영상 속의 연주회가 뉴스 영상으로 기록될 정도의 연주회였다면 이에 관해 현지 신문들이 침묵했을리 없으므로, 9월부터 11월 사이에 더 이상의 연주회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동영상 속 연주회가 ’10/10 연주회’가 아니었을 가능성은 없다. ’10/10 연주회’는 이 무렵 안익태의 유일한 헝가리 연주회였다[2]. 더구나 이 연주회의 레퍼토리에는 안익태 작곡의《에텐라쿠》라는 곡이 포함되어 있다[3].

’10/10 연주회’와 분류 항목 사이의 시간적 근접성, 일간지상 ’10/10 연주회’만이 확인되고 이 연주회가 당시 안익태의 유일한 헝가리 연주회인 점, ’10/10 연주회’에서《에텐라쿠》가 연주된 사실에 의해, 동영상과 ’10/10 연주회’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즉, 동영상은 ’10/10 연주회’에서《에텐라쿠》가 연주되는 장면을 담고 있다.


 


3.《에텐라쿠》와《강천성악》의 관계


동영상 속의 선율과《강천성악》의 클라이맥스 부분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즉, 소재(주선율)와 기법(전개 및 처리 방식)면에서 차이가 없다. 이는《에텐라쿠》와《강천성악》의 동일성을 밝혀주는 중요 단서이다. 불과 1분에지나지 않는 선율만으로도 이렇게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녹화된 부분은, <만주국 동영상>의 경우에서 보았듯이[4], 임의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기도된 정치적 효과(내지 메시지)’가 가장 잘 홍보될 수 있는 대목이기에 선택되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동영상에 담긴 장면은 이 연주회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즉 연주곡의 핵심 부분일 수밖에 없다. 음악작품의 핵심 부분을 흔히 클라이맥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에텐라쿠》는《강천성악》과 동일한 클라이맥스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된다.

서양음악계에서 19세기 이래 음악가의 지위가 수공업자로부터 창조적(인격적) 예술가로 평가절상 되면서 그들의 음악작품이 고유성을 가진 개체로 인정받게 된 결과, 바로크 시대와 같이 어떤 작품에 사용된 선율을 다른 작품에 차용하는 일은-음악적 인용 같이 극히 드문 경우 외에는-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클라이맥스와 같이 어떤 곡의 중핵을 이루는 부분이 다른 곡에 차용되는 일은, 적어도 19세기 이래의 ‘작곡가’에게서라면, 더욱 더 상상할 수 없다. 안익태도 클라이맥스를 이처럼-어떤 곡의 본질을 규정짓는, 치환 불가능한 부분으로-이해하고 있었음을,《한국환상곡》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한국환상곡》은 시류에 맞추어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그 어떤 판본에서도 클라이맥스 부분, 즉 애국가 부분만큼은 일정한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 하에 동영상에 담긴 선율이《강천성악》의 클라이맥스와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 한, 나는《에텐라쿠》와《강천성악》이, 동일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판본마다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는《한국환상곡》[5]의 경우와는 달리, 상이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용상 동일한 곡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4.《강천성악》과 안익태


위와 같은 결론에 입각하여 나는《강천성악》곡해설이 안익태의 선의의 과실이 아니라 적극적 고의의 소산이었음을 확신한다.《에텐라쿠》는 1945년 이전에 연주된 대규모 관현악곡 중 당대 평자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던 작품이다.


이 곡은 해방 후 정국에서 ‘있는 그대로’ 연주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두 사실의 교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변동된 정치 상황으로 인해《에텐라쿠》를 그대로 보여줄 수가 없어 수정이 불가피해졌지만 곡 자체에 관해서만큼은 자부심이 있었기에 대폭 수정을 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고 싶지는 않다.


그 해결책으로서 ‘개명’이라는 방법은 매우 간편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 새 제목 위에 ‘민족’, ‘애국’이라는 코드마저 덧씌워 새 곡으로 둔갑시키게 되면 곡을 수정할 필요도, 감추고 싶은 과거를 애써 지워야 할 필요도 사라질 뿐 아니라, 덧입혀진 수식어들의 후광에 힘입어 해방 정국에서 가위 전폭적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일 수밖에 없다. 안익태가 이 정도도 계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면 내 생각에 그것은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발상이다.


예를 들어, 민족을 위해 작곡했다던《한국환상곡》을 안익태는 “great hero”, “great patriot”라고 추켜세우며 이승만이라는 개인에게 헌정한 적이 있다. 본인의 귀국을 실현하기 위해-아마도 한국전쟁 말기-이승만에게《한국환상곡》악보를 보내는 등 환심을 사던 무렵이거나 이승만 80회 생일 기념연주회의 지휘자로 한국에 첫 발을 들일 때의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헌정사는 정치 상황이 변화하자 사라진다[6]. “5·16 혁명 돌맞이 축하음악회”인 제 1회 서울 국제음악제를 위시하여 새 정부 하에서 활동하기 위해 그렇게 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압이 아닌 바에 헌정사를 정치 상황에 따라 썼다 지웠다 하는 모습에서 나는 그가 ‘소신’을 가진 사람이었다기보다는 정치적 풍향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자신의 성공을 겨냥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의 ‘소신’은 소신이라기보다는 립서비스에 가까운 수사학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강천성악》의 덧칠 작업, 그 작업의 결정체가《강천성악》곡해설이었을 것이다. 안익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세종대왕께서 영감을 받아 아악을 작곡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 한국의 ‘피리’로 […] 표현하며 […]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천국의 아름다운 소리는 현세를 초월한 낙원을 사모하게 한다[7][…] 이 작품의 주요 라이트모티브는 15세기 세종대왕에 의해 작곡되었다고 여겨지는 옛 한국의 궁정음악에서 차용했다[8]

두 해설로부터《에텐라쿠》와의 관련성 세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안익태는 자신의 이 곡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곡’이라는 모티브와 불가분의 관련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둘째, 샤쿠하치를 한국의 피리로 대체했다. 셋째, 8~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궁중음악을 15세기 한국 궁중음악으로 바꿔치기 했다. 만일 안익태가 자신의《에텐라쿠》가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진 곡인지 몰랐다면, 즉 선의였다면,《강천성악》의 곡해설에 세 가지나 ‘에텐라쿠’ 설명 모델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 치고는 대단한 우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 연주회 프로그램과 신문 비평에서 빠짐없이《에텐라쿠》는 ‘에텐라쿠’를 바탕으로 한 곡이며 후자는 8~9세기에 유래한 일본 궁중음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작곡자만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안익태는《에텐라쿠》를《강천성악》으로 위장하면서 새 곡해설을 원 곡의 탄생 배경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붙잡아 둘 수 있도록, 곡이 갖고 있는 의미도 충족하는 동시에 한국인에게도 박수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각색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세종”, “한국 궁중음악”, “한국 피리”는 모두 그같은  계산에서 나온 위장 장치들일 뿐이다.


5. 안익태의 음악관


《에텐라쿠》를 구제하기 위해 새 제목을 붙여 재탄생시킨 행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일본을 위해 썼고 그렇게 통용되던 곡을 정치 상황이 바뀌자 마치 한국을 위해 쓴 곡인 양 거짓을 행하였고 이에 대해 아무런 반성이나 사과를 한 일이 없다는 데에 있다. 만일 그가 지금도 생존해 있다면 반성이나 사과를 했을 것인가 ? 나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하기에는 그의 음악관이, 흔히 예술지상주의로 치장되곤 하지만, 예술을 빙자한 기회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더블린 연주회 무렵 안익태는 “좋은 음악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라도, 좋은 음식이나 운동 또는 취미와 같이 꼭 필요하다”면서 그 이유가 “비록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음악은 사람이 가진 리듬, 감정에 대한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고 음악은 “정치적, 민족적 적대감의 그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것”이고 세상은 “자유의사를 가진 각 연주자가 악기를 완벽히 연주함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오케스트라와 같다”고 주장했던 바 있다[9].

즉 그의 생각으로는, 음악의 요체는 ‘조화’와 ‘협력’이었다. 이것은 대동아공영권의 구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안익태의 이 인터뷰가 시점상 아직 대동아공영권이 구체화되어 실행되기 이전의 일이므로 양자를 직접 관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조화와 협력이라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가 종래 내걸었던 아시아 연대론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주창하던 구호들에 의해 안익태가 영향을 받았는지, 받았다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마치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일본의 침략주의 논리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어 결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악용되었던 경우처럼, 안익태의 음악관이 예술이라는 그럴싸한 방패막이 뒤에 숨은 유약한 현실 인식이다보니 결국 일본의 대동아 논리에 매몰되고 말았을 수도 있다.

안익태는 말한다: “한국인들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투쟁심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날, 아일랜드는 자유 국가이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발언 내용만 놓고 본다면 나는 안익태를, 참여 예술가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실 인식이 투철했던 음악가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한국환상곡》은 1938년에 초연된 지 불과 2년만에 종말을 고했다[10]. 반면 1938년에는《에텐라쿠》가, 1942년에는《만주국》이 작곡되었다. 해방이 되자-즉,《한국환상곡》이 연주되어야 할 정치적 상황이 무르익자-여러 편의 수정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안익태가 자신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했는지, 투쟁했어야 했을 시기에 그가 자신의 말처럼 투쟁을 했는지에 관해 내 스스로에게 되묻게 된다. 아직까지 나는 이에 대해 긍정의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6. 맺음말에 대신하여


안익태의 현실안주적 시대인식과 기회주의, 그들과 음악관과의 관계 등에 관한 보다 상세한 이야기는 여러 사정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발견된 자료보다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료들이 더 많기 때문에 그 사이 지금 나의 시선 방향이 옳지 않았다고, 섣부른 판단이었다고 판명될 수도 있다. 차라리 그런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흑색선전과 모함을 받고 있어 구제되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고 안익태이기 때문이다.


[1] 예컨대 ‘Kangteunsungak’이라는 제목의 필사본 악보(Eaktay Ahn)에서 68~80마디 부분이다.
[2] 허영한. “자필 기록에 의한 안익태의 유럽 활동 재구성”,『낭만음악』, 2006년 겨울호, 통권 73호, 22쪽.
[3] 1941년 10월 10일 부다페스트 Pesti Vigado 홀에서의 연주회 프로그램 참조.
[4] <만주국 동영상>에는 마지막 4악장의 합창 장면만이 담겨 있다. 이 연주회의 핵심 메시지, 즉 만주국의 번영과 대동아공영의 영속을 기원하는 내용이 바로 합창의 내용이다. 이에 관해서는 졸고 “안익태의 알려지지 않은 두 작품”(객석, 2006년 3월호) 참조.
[5] 전정임,『안익태』, 초판 2쇄, 서울:2001, (주) 시공사, 136쪽.
[6] 탈라베라,『나의 남편 안익태』, 168쪽.
[7] 과테말라 국립교향악단 연주 실황 음반. 전정임의『안익태』에서 재인용(167쪽).
[8] 1960년 런던 교향악단 연주회 프로그램. 이경분의『잃어버린 시간』에서 재인용(149쪽).
[9] Sunday Independent, 1938년 2월 19일자.
[10] 현재까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 1940년 5월 벨그라드 연주회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한국환상곡》이 마지막으로 연주된 경우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