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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21]권두 인터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윤경로 한성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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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인 윤경로 한성대 총장은 월간 <민족21>과 권두 인터뷰를 통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의의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인터뷰 전재를 허락해 준 민족21 측에 감사드린다.<편집자 주>


 


 















“과거의 잘못된 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를 용인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행동하는 양심인 알베르 까뮈의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친일반민족행위’라는 잘못된 범죄에 대해 반성은커녕 역사적 사실조차 제대로 연구·정리하지 못했다. 친일잔재를 제때에,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우리 현대사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뒤틀리고 고통스럽게 만든 배경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아가 바람직한 대외관계를 가로막고 민족의 숙원인통일에도 걸림돌로 작용해 온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잔재 청산과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될 성과를 민간단체와 전문연구자들이 수행해냈다.

지난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이하 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8월에 이어 두 번째로 친일인사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2001년 편찬위원회가 창립된 후 다양한 형태의 압박과 방해가 있었다. 관련예산 5억 원이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전액 삭감 당하기도 했고, 민족문제연구소 현판이 뜯겨나가기도 했다. ‘색깔론’식 마녀사냥은 그저 일상이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힘은 이 모든 방해와 곡절을 넘어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국회의 예산삭감에 분노한 한 네티즌의 제안은 수만 명의 국민들이 단 3주 만에 7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으게 했고, 돈보다 더한 용기와 힘을 주었다.

《민족21》에서는 지난 7년 동안 곡절도 많고 보람도 많았을 편찬위원회 사업을 앞장에서 이끌어온 윤경로 위원장을 만나 이번 명단 선정의 의의와 기준, 이를 둘러싼 논쟁점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았다.


글정용일 취재부장 onecoree@minjog21.com
사진김도형 기자 kdh8747@minjog21.com


 


 


▶지난 2005년 8월에 1차로 3090명의 명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난번과 비교해 이번에 선정된 4776명의 선정 원칙과 특징은 무엇인지요.


“1차 때의 3090명의 비해 약 1600명이 늘었습니다. 그 이유는 1차가 주로 총독부에 속해 있던 관료 등 서울 중심의 중앙 편이었다면 이번에는 추가조사로 행적이 보완된 친일혐의자와 지방의 친일인사를 포함시켰습니다. 중국 만주와 러시아, 일본 등 해외 친일행위자도 포함되었고,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경우 1차 때는 가급적 줄이는 방향으로 선정했으나 여러 차례 토론을 거치면서 대중들에게 미친 파급효과가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컸다는 중론에 따라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게 됐습니다. 그 외의 기준은 1차 때와 대동소이합니다.”








▶예상된 일이지만 유족 및 관련 단체들의 반발이 거셉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친일청산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늘 논란에 휩싸이는 이유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동양권 특히 한국인들은 가문과 문중에 대해 남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명단에 들어가면 친일파가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60년이 지난 문제인데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한 번은 풀고 가야 합니다.”


 


개항 이후 기득권층 한번도 바뀐 적 없어


 


 ▶직계 가족들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뉴라이트 계열의 단체들이 시비 걸고 나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개항 이후 근대화 과정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층


은 변함 없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수많은 정당들이 이름을 바꿔 가며 등장했지만 한번도 가치관이 바뀐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이들 기득권층들은 뭔가 자기들의 것을 소위 좌파들에게 빼앗긴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 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대단히 곤란합니다. 친일청산 문제는 사실 대한민국 건국과 동시에 시작됐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좌파적인 성격을 띄고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가 대한민국 수립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반민특위를 구성한 것입니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141명 중 103명이 찬성, 6명이 반대, 나머지 32명이 무효투표해서 나오게 된 겁니다. 이것은 북뿐만 아니라 남도 나라를 세우고 제일 먼저 할 일이 과거청산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만 60년 전에 이미 해결됐어야 할 문제가 정치적 지반이 취약했던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재기용 등 정치적 이유로 오늘까지 미뤄져 왔을 뿐이죠.”

▶뉴라이트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반국가적 행위이다’ ‘우리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폄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선진화를 저해하는 자해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소위 ‘국론분열론’은 우리 사회뿐 아니라 국경과 민족의 경계가 무의미할 정도로 글로벌화된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고착화된 편향입니다. 자유민주사회의 강점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사회가 그 정도로는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조금만 다른 생각을 말하면 바로 국론분열로 몰아가는 것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식 수법입니다. ‘자학사관’에 대해 말하자면 그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를 일방적으로 위대성만 강조한 경향의 반대급부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공이 있고 과가 있는 것입니다. 민족해방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역사와 함께 그 과정에 있었던 어두운 그늘도 이제는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학이 아니라 성숙된 사관, 열린 사관으로 보아야 합니다.”



‘국론분열’ ‘자학사관’ 아닌 성숙되고 열린 사관 가져야



▶이미 지난 일인데 왜 들추나, 그런 기준이면 다 친일파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살았다고 다 친일파는 아닙니다. 일제 식민지 40년이 짧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에 불가피한 생계형을 제외하고 적극적, 의도적 친일행위자를 직위와 행위 크게 둘로 나누어서 선정한 겁니다. 관료의 경우 원래는 면장을 했던 사람들까지 명단을 다 확보했지만 너무 아래로 내려가는 것 아니냐 하는 의견이 있어서 관료는 고등관 즉 군수 이상, 군인은 위관 이상, 법조계는 판검사 이상으로 극히 제한한 것입니다. 여기에다 직급은 비록 낮아도 악질적인 친일행위를 한 사람, 예를 들면 밀정이나 고등계 형사들을 포함시킨 겁니다. 그것도 관련 자료가 명백히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죠.”


▶죽은 조상의 죄를 왜 아무 관련 없는 후손들이 져야 하느냐, 새로운 연좌법 아니냐는 항변도 있습니다.

“앞서도 강조했지만 친일청산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역사화’하자는 것입니다. 자랑도 역사화하고 허물도 역사화하자, 그래서 훗날 반면교사로 삼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대에는 비록 잘 먹고 잘 살아도 자신의 행위가 옳지 못하면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교육, 학습시키기 위해 인명사전을 만든 것이지 결코 연좌가 아닙니다. 직접 관련된 후손들에게는 이의가 있을 수 있으나 큰 문제없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만약 후손들로부터 명예훼손이나 고소·고발이 들어오면 어떻게 처리합니까. 또 그런 선례가 있었는지요.

“우리가 특정인을 음해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증과 연구라는 측면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일부 소송이 있을 수 있겠지만 과거의 자료와 기록을 토대로 기재한 것이기 때문에 기록 자체에 대한 진위논란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송에서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실제 1차 명단을 발표한 후에 몇 건의 소송이 있었지만 모두 무혐의 처리 된 선례도 있고요. 우리가 미리 4월에 발표한 것도 혹시 있을지 모를 억울한 사례를 막기 위해 이의제기를 받겠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번 발표도 친일명단에 올라갈 수록 대상자를 발표한 것이지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역사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근본 이유는 무어라 보십니까.

“해방 후 두 세대가 지나도록 친일청산이 되지 않은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앞서 얘기한 정치적 이유 때문입니다. 자유당 정권부터 최근의 국민의 정부 이전까지는 당 이름은 달라도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기 아니었습니까. 또 하나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친일청산을 주장하면 무조건 색깔론을 들고 나와 폄하하거나 친북 딱지를 붙이는 것이 그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그동안 현대사 다루기를 꺼려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안들이 너무나 예민하고 당사자들도 살아 있고, 또 그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죠.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간헐적으로 얘기는 나왔지만 아무도 실행은 하지 못한 실정이었습니다.” 









이제는 내부 갈등과 모순도 ‘고백’해야




▶이런 상황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앞서도 얘기한 것처럼 친일문제의 역사적, 학문적 청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관계를 밝혀야 하는데 인명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역사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다시 말해 비록 당대에는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릴 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정당하지 못할 때에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역사학자로서 누군가 역사에 대해 물으면 늘 ‘고백’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왔습니다. 제가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일본의 교과서 문제 등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과정에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문제를 좀 더 설득력 있게 풀자면 외인론도 강조해야 하지만 내부의 갈등과 모순에 대해서도 이제는 언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인론만 강조하면 자칫 외세가 역사의 주체로 되고 맙니다. 내외적 인식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성숙한 시각을 가지고 식민지 역사의 이면에는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도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일본에게도 성숙한 자세로 잘못을 인정하고 과거청산에 나서라고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거사 청산’하면 외국의 사례, 특히 프랑스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2차대전이 끝난 후 드골 정부는 비시정권 하에서 나치에 협력한 인사들을 강하게 처벌했습니다. 비록 4년이라는 짧은 지배기간이었지만 12만 명이 넘는 사람을 조사해서 그 중 약 10만 명이 사형, 금고형, 공민권 박탈 등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 것으로 압니다. 특히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은 예외 없이 처단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도 당대의 지식인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4776명은 너무 적은 숫자입니다. 물론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숫자는 아니었지만 반민특위 당시에는 약 20∼30만 명이 친일부역 대상자로 지목된 것에 비하면 말입니다.”

▶이번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 중 최승희, 문예봉 등 월북 후 북의 각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평가와 북에서의 친일청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북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정권 수립 전인 1946년에 이미 친일반민족행위법을 만들어 공민권 박탈, 재산환수 등의 친일청산 작업을 대부분 완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6·25전쟁을 전후로 지주 등이 대부분 남쪽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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