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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세대, 일본군 학대관련 정의 세우려 노력-인디펜던트(08.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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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세대, 일본군 학대관련 정의 세우려 노력
(Generation of ‘Comfort women’ seek justice over abuse from marauding Japan troops / 영국 The Independent, 4.24, 29면 7단, David McNeill)



한국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위안부’들이 수년간 정의를 위해 싸워왔다. 그러나 일본에서 커져가고 있는 수정주의 운동은 이들이 당한 폭력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할머니라고 불린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너무 상처를 입어 결혼을 한 적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 일본에서 이들은 “위안부”로 알려져 있다. 이는 군부대 매춘소에서 일본군들에게 “위안”을 제공한 강제 역할에 대한 완곡 표현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는 더욱 적나라한 이름이 이들을 무덤까지 따라갈 것이다. 즉, 성노예라는 용어다.

강일출 할머니는 나눔의 집에서 마지막 여생을 살고 있는 몇 명 남지 않은 생존여성이다. 나눔의 집은 서울에서 2시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박물관이자 공동 피난처이다. 이는 논과 산지에 위치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평안을 찾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나를 잘 챙겨주는 친구들과 같이 있다”고 말한다.

15세에 붙잡혀 만주의 일본부대로 보내졌다고 그녀가 말한다. 첫 생리도 시작되기 전, 둘째날밤, 그녀는 강간을 당했다. 군인들이 매일 밤 줄을 서서 그녀를 폭행했다. 그녀는 목 밑에 담뱃재로 지진 자국이 있고 일본 장교한테 손으로 맞아 두통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나한테 일어난 일을 생각할 때 아직도 피눈물이 흐른다”고 그녀가 말한다.

다른 많은 여성들처럼, 그녀에게도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깊은 상처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베신조 전 일본 총리가 언급되었을 때 책상을 치면서 화를 냈다. “아베 그 끔찍한 인간”이라며 그녀가 침을 뱉었다. “그는 우리가 죽길 바란다.”

지난해, 아베 전 총리는 일본의 입장을 뒤집고 위안부 여성들이 강제 매춘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나눔의 집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동맹 미국으로부터의 정치폭풍과 압박 가운데, 그는 일련의 조심스레 선택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부정이 강 씨를 “놀라게 했다”. “심장이 뒤집어 지는 것 같았다”고 그녀가 말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최대 우려는 우리가 죽으면, 이들의 범죄가 잊혀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안신권 나눔의 집 사무국장이 말했다.

암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수천 명의 아시아 여성들은 (일부는 12세에) “수개월과 수년간의 노예생활을 했으며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으며 폭행을 당했다”

성폭행, 폭력 및 강제 낙태로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한국의 소규모 희생자 그룹이 1990년대 초 목소리를 낼 때까지 침묵을 지켰었다. 김학순 할머니가 제일 먼저 피해를 증언했는데, 자신이 강간당했으며,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화장실 변기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밝혔다. “우리는 우리가 강제로 해야 했던 이러한 일들을 기록해야만 한다”고 죽기 전에 말했었다.

일본은 1993년 담화에서 공식적으로 종군 노예를 인정했으며, 이후 소규모 민간기금을 설립해 위문금을 지급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는 2007년 종료되었다. 그러나 소위 고노담화는 오랫동안 일본 수정주의자들을 괴롭혀왔다. 일본 수정주의자들은 군대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려고 한 법적 매춘부였다”고 수정주의 학자 후지오카 노부카쯔 씨가 주장한다.

아베 전 총리가 후쿠다 야스오 총리로 바뀌었지만, 강일출 할머니와 다른 희생자들은 (위안부) 부인주장이 차기 일본 총리에게서 다시 나오는 것이 시작 문제일 뿐이라고 두려워했다. 이들의 투쟁이 그들의 삶의 마지막 해를 규정한다. 이들이 지면, 이들은 결과적으로 매춘부라고 낙인찍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요청은 약 50여명의 여성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안신권 사무국장이 회상한다. “많은 할머니들이 겨우 생계를 이어가면서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작은 도시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불교단체가 1990년대에 나눔의 집 건립을 도왔다.

건강이 허락하면, 82세의 강일출 할머니는 매주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앞에서의 시위에 참여한다. 전 성노예들은 1990년대 초부터 이곳에 오기 시작했으며, 지난 2월 800번째 시위를 기념했다. 이들을 강간한 사람들에 대한 처벌, 일왕으로부터의 사죄 및 일본 내 기념비 건설을 포함하는 이들의 요구는 분노에 차 외쳐지고 있지만,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다.

수요 집회는 이미 이 작은 그룸의 생존자들이 질병과 사망으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의식화되었으며, 슬픈 빛을 띠고 있다.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혼다 정치인이 지원하는 결의안은 일본정부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정부가 여성들을 체계적으로, 강제로 징집했다는 주장을 “실증할 증거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오늘, 혼다 의원을 보여주는 커다란 배너가 나눔의 집 마당에 걸려 있다. 혼다 의원과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서명한 결의안 121법안의 복사본이 안신권 사무국장의 사무실에 걸려있다.

어쩌면 놀랍게도 안 씨는 자국 정부에 대한 분노를 삼가고 있다. 많은 다른 활동가들처럼 그는 한국 정부가 1965년 일본과 우호조약에 서명했을 때, 수백만 달러 상당의 차관을 받는 대신 보상을 팔아버렸다고 믿는다.

그는 그들의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일본국민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매년 약 5천여 명의 일본인들이 그의 사무실에 방문한다고 그가 말한다. 이들은 전 성노예들과 만남을 가지고 종종 고통을 느끼고 눈물을 짓는다. 일부는 자원봉사자로 나눔의 집에서 봉사하기 위해 남기도 한다.

그러나 강일출 할머니는 일본 언론인들에게 많은 의심을 품었다. “그들은 우리를 약하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여주길 원한다.”고 그녀가 다시 한번 책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특히 카메라 기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가장 나이 많고 가장 병든 여자들을 따라다닌다”. 나중에 그녀는 기자가 병약한 여성이 무표정하게 TV를 시청하고 있는 모습을 찍는 것을 막았다. “우리를 강하게 보여줘야만 한다”고 그녀가 요구했으며, 성노예기념비 옆에서 복싱선수처럼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자신이 붙잡혀간 날을 회상했다. “군인들이 내 이름이 적힌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트럭에 태웠다. 조카가 그들을 보기 위해 나왔었다. 조카애는 아직 애기였는데, 군인들을 그 애를 발로 찼고, 걔는 죽었다”

이러한 기억들은 그녀를 강하게 만든다고 그녀가 말한다. “장래의 세대들이 우리를 매춘부라고 부를 것이다. 그들(일본정부)이 우리 체면을 살리든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체면을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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