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친일’을 반성하고 책임지려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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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와 반성, 그 실제 사례를 모았습니다.<편집자 주>


 


 


당사자들의 고백과 참회


학교장 이하 전 중등학교 직원 “조선 학도들과 사회에 사죄” 의미로 총사직 결의
15일 「중등교육자대회」에서 조선임시중등교육자협회를 결성하고 앞으로 새 조선의 귀중한 역군을 길러내는데 중등교육자들의 대동단결을 꾀하여 헌신노력할 것을 맹서하였거니와 과거의 일본제국주의의 교육제도 아래서 교단생활을 하여 온 그 가슴 괴로운 심정을 삼천만 민중 앞에 사죄하고 또 그 책임을 져야 할 처지를 밝히고자 각 학교장 이하 전중등학교직원은 19일 총사직을 결행하기로 의결이 일치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에 비추어 교장 이외의 직원만은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어 그 문교당국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각자 직역에서 종사하기로 되었다. 다음에 그 성명을 소개하기로 한다.


聲明
… 민족해방으로부터 인민본위의 신흥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성을 가진 것은 교육이므로 교육자 책임은 중대함을 느끼는 바이다. … 그러나 8月 15日 이전의 우리 교육계를 반성하여 볼 때 우리는 일본제국주의의 탄압과 착취아래 부득이 주구적인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가장 양심적이며 산 실천과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교육자들로서 마땅히 교육자적 책임을 져야하겠다. 하야 총의를 결의코 朝鮮中等學校敎育者의 총사직을 이행하여서 사랑하는 조선학도들과 사회에 사죄하기로 하였다. 단 학교장 이외의 교직원은 생도의 현상을 감하여 정부가 수립되어 문교당국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각기 지역에 종사하겠으니 인민제위의 감시와 편달이 있기를 바란다. 右 성명함. 1945年 9月 15日 朝鮮臨時敎育協會 (매일신보 1945.9.15)


현석호(玄錫虎)충남 광공부장


“고급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사표 제출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관리로서의 거취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나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없었으나,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 원인이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투쟁에서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공로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 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관리생활 동안에 피부로 느꼈던 차별대우와 모멸감에서 해방된 기쁨과 감격은 남 못지않게 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의적 죄책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현석호, 『한 삶의 고백』, 탐구당, 1986, 24-28p)


*회고록에 담긴 사표 제출 경위 – 1945년 9월 중순경, 충남 도지사로 부임한 미 군정 육군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이유를 묻는 지사에게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엄상섭(嚴詳燮) 등 8인 “일제하의 검사로서 민족정기 앙양에 협조할 필요 통감” 사표 제출


친일반역자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과거 일제시대의 친일파처단이 주목되고 있는데, 이번 검찰청에서는 대검찰청 차장 엄상섭씨 등 8씨는 일제시대의 검사를 한 몸으로서 신정부의 수립을 본 지금 민족정기 앙양에 협조하여 자기반성을 하는 의미에서 지난 23일 사표를 제출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성명서
우리들이 일제하의 검사로서 해방 후도 다시 미군정에 협조하였음은 오로지 이것만이 역사적인 건국성업에 이바지할 것으로 확신함으로써 였었는데, 오늘날 독립정부가 수립되고 검사 진영의 우수한 인재가 배출된 이 마당에 있어서 민족정기가 고창되고 있는 현하 정세에 비추어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할 뿐더러 인심 쇄신과 민족정기 앙양에 협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통감하여 이에 우리 일동은 사의을 표명하는 바이다. (민주일보 1948.8.24)


“굴절했고 왜제통치에 협력하였다는 것만은 아무리 사과를 하여도 모자랄 것”
“이 검사생활, 이것이야말로 왜정 압력 하에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시던 애국지사들에게 대하여는 지금도 면목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공사(公私)의 생활에서 마음에 꺼림칙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왜제하(倭制下)의 검사, 즉 고관(高官)을 지냈다는 것만은 한없이 후회되는 일입니다. 그 동안 사상사건을 취급시키지 아니하던 왜제하의 검찰정책 때문에 큰 죄를 지을 기회는 없었으나, 굴절했고 왜제통치(倭制統治)에 협력을 하였다는 것만은 아무리 사과를 하여도 모자랄 것입니다.” 〔허일태신동운엄상섭, 『권력과 자유』(1957년 4월 출간 엄상섭의 동명저서 재편집), 동아대학교 출판부, 2007, p471)


이항녕(李恒寧)․군수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
“일제 말 27세의 젊은 나이로 하동군수를 지내면서 저 자신의 출세와 보신에 눈이 어두워 (군민들을) 죽창으로 위협까지 했던 저를 너그럽고 따뜻하게 맞아주신 하동 군민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1991.7.10 바르게살기운동 하동군협의회 초청 강연회)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장래다, 이런 것보다는 편한 쪽을 택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끄럽죠.”“한국 학생들을 보면 반일사상을 가지고 일본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또 일부는 일본이 저렇게 강국이 되었는데 어지간해서는 망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저 거기 붙어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안일한 생각을 가진 학생도 있었어요. 저는 후자 쪽이었죠. 민족이다, 우리나라의 장래다, 이런 것보다는 개인의 신상이 편한 쪽을 택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끄럽죠.” (이항녕, 『8.15의 기억-해방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체험』, 한길사, 2005)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
–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 학병 권유, 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 독려했습니다. 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 항간에는 일제 말기에 군수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 생각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 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2004.4.18 『오마이뉴스』, 정운현,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


* 이항녕 선생은 1945.10월까지 창녕군수로 재직했고 미군정으로부터 경남도청 사회과장으로 발령을 받자 한달 뒤 사표를 제출했다. 1961년 자전적 소설 『청산곡』(경향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친일’에대한 부끄러움을 여러 차례 글로 써서 발표했으며, “일제의 청산은 부역자들의 사죄가 앞서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김남식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청소”

“왜정 때 학생들에게 일본말 쓰기를 시킨 것에 대해 벌을 받는 의미로 청소를 이어나가고 있다. 1939년 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는데, 일주일에 한 시간짜리 조선어수업 말고는 우리말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주번 교사는 아침마다 4명의 주번에게 각각 ‘국어 상용’이라고 쓰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패를 줬다. 주번은 우리말을 쓰는 친구를 발견하면 그 패를 그에게 건넸다. 운동장 구석에서라도 우리말을 쓰면 그 패를 받아야 한다. 그 패를 받은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하교 시간까지 못 넘기면, 최종적으로 교무실에 그 패를 들고 가야 한다. 늦게나마 ‘내가 교사로서 참 나쁜 짓을 했구나’ ‘민족반역자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한겨레21』 2006.2.28)


* 김남식 선생은 일제 식민지 교육을 담당한 사실을 반성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동대문구 회기동 주변의 쓰레기를 줍고 있으며 ‘국민학교’ 명칭바꾸기운동에도 큰 공헌을 했다.



후손들의 사죄


파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 선생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부친의 일대기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1994. 펴내는 말에서) * 경찰총경으로 은퇴한 김영식 선생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하기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에 매월 회비도 내신다.


조승제(목사)의 손자 조헌정 목사
“이 고백이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데 밑거름이 됐으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항거해 투옥과 죽임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현실과 타협하고 일제가 저지른 전쟁의 승리를 기원한 할아버지의 부일행각은 분명히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입니다. … 비록 저의 개인적 고백이지만 이 고백이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데 밑거름이 됐으면 합니다.” (2003.8.10 향린교회에서 열린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주일예배 중 ‘죄책고백선언’에서)


이준식(李畯植, 관료)의 손자 이윤 선생
“친일인사 (1차) 명단발표 며칠 후에 아픈 마음으로 자신을 고백합니다.”
“이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에 앞서 일차적으로 단순히 그에 수록될 명단만을 발표했을 뿐인데도 세상은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지? 붓을 놀려 살고 있는 소위 ‘조동’을 필두로 하여 입에 개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죄하지 못하는 무리들에게 새삼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일개 무명교사일망정 내 자신부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으로서 이런 어두운 과거를 규명하고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전폭적인 성원을 보냅니다.” 〔2005.9.3 이윤 선생(전 홍대부고 교사)의 글에서〕


한용수․한창수․한상용의 후손 한진규 선생
“조상들의 업적과 함께 친일행동도 함께 후손이 책임지는 것이”
“60년이나 지난 지금, 많이 늦었지만, 자신의 조상들의 업적과 함께 친일행동도 함께 후손이 책임지는 것이, 조상들의 노고를 후손이 나눠가지는 것이며, 또 그렇게 작지만 용기 있는 행동 하나만으로도 한국사회는 조금씩 바뀌어나갈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5.9.5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발표 후 한진규 씨가 민족문제연구소에 보내온 이메일에서)


비공개를 청하신
“조상 어르신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
저희 조상 어르신들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후손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용서를 빕니다. … 지난날의 조상의 잘못된 것을 생각하는 자리에서 나에게 후손들이 그 시대에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할 말이 있을까? 지금 이 시대에도 반인륜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일들을 벌이고 있는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내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박○○. 보잘 것 없고 아무도 이름 석 자 알아주는 이 없는 민초입니다. (2005.9.5 민족문제연구소에 도착한 메일에서)



후진들의 반성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대희년 ‘쇄신과 화해’(2000.12.3) 중에서


우리는…참회를 바탕으로 자신을 쇄신하면서 민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이들의 대열에 함께 하려 합니다.

2.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총회 친일과거사죄책고백특별위원회 발표 고백문(2006.1.20) 중에서

진실은 마냥 덮어두고 잊혀지기만을 기다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친일 부역은 단순히 식민지 백성의 비굴한 조아림을 넘어 일왕과 신사를 숭배하고, 대동아공영의 가치를 두둔하며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이것은 심대한 배교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우리에게도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1935년 암울한 식민치하에서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높이 외치며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창립되었습니다. 교단적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모진 시절을 꿋꿋이 견디면서 민족교회로서의 사명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적인 마수는 1942년에 이르러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에게 무거운 죄책의 짐을 지게하고 말았습니다. … 우리는 더 이상 어떤 내용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 뜨거운 눈물이 있는 진실한 죄책고백 뒤에는 진정어린 용서와 화해, 희망 있는 전진을 기대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사참배 외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2007.9.13) 중에서

일제강점기에 하나님과 민족 앞에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 통절한 심정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해 온 것을 고백합니다. … 우리는 교회가 또다시 하나님과 민족의 역사 앞에 부끄러운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수치스러운 죄악을 기억하며 역사의 교훈으로 길이 간직하고자 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친일청산을 통한 국가비전 창출과 과거사정립 노력 촉구 성명서’(2005.1.5) 중에서

이제 우리는 과거 우리 민족이 처했던 질곡의 역사를 넘어 과거사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참회와 국민적 용서와 합의를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무궁한 발전을 기약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대화합이 이룩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죄보다 과거사에 대한 참회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 과정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잘못된 과거 앞에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내일을 향한 비전은 튼튼한 윤리적 토대와 민족공동체 의식에 기반한 우리 민족 특유의 역동성을 통해 확립할 수 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모국어의 미래를 위한 참회’(2002.8.14) 중에서

역사는 지난 시대의 진실을 유보하거나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광복 57주년을 맞아 우리 문학인들은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문학작품목록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코자 한다.

우리 문학계는 반세기가 넘도록 친일문학에 명쾌한 개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이들 작품들에 대한 평가를 공식화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친일문학인들이 국정교과서에 버젓이 활개를 치고 행세함으로써 진정한 문학의 이름을 호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민족정기를 훼손하고 겨레 모두에게 심대한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우리가 몸 바쳐 이룰 진정한 문학 앞에 사죄코자 한다.

무릇 과거의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않고서 맞을 수 있는 미래란 없다. 압도적인 폭력이나 거대한 시대적 구조 속에 던져진 개인의 선택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상황론과 그에 따른 동정론, 그리고 공적과 과실을 따져 평가하자는 공과론 등은 모두 기만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그러한 논리들이 최소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친일을 했던 당사자들의 자기 고백이 선행되었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해 버림으로써 우리의 근대사는 부끄러웠던 식민의 역사를 용서하고 반성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당연히 진정한 화해도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함께 기획할 수 없었다.

돌아보면 친일을 했던 사람들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득권과 힘을 바탕으로 현실 위에 군림함으로써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의 삶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들의 상속자들은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래를 희생해야 하느냐고 반격하지만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만이자 기회주의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까지나 현재형의 질곡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해방 이후의 근대사를 통해 확인하여 왔다.

인권과 자유를 유린했던 군사독재시절, 권력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저항하기보다 오히려 그에 편승해 개인의 안일을 도모하거나 시대적 가치를 왜곡시키는 데 기여한 문학인들 중 일부 인물들은 친일문학으로 모국어의 도덕성을 심하게 훼손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상속자들이다.

모국어의 운명과 동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문학인의 운명일진대 이러한 친일문인들의 행적은 보다 근원적인 반성의 과정이 요구된다. 당사자들의 반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혹은 당사자들이 직접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타계한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자청하여 모국어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친일의 그 아픈 상처를 스스로 공개하고 사죄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갖는 것은 뒤늦게나마 왜곡된 역사를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하는 민족적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 문학계는 새로운 역사단계에 들어서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출발점을 이것으로 삼고자 한다. 친일문학을 가리는 규준은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우선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 여부를 친일의 기준으로 하되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론’과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령’에 대한 옹호 여부를 확인하여 친일문학으로 규정하였다. (친일문인 명단 및 친일문학작품 목록을 발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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