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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경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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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가곡 ‘가고파’, ‘목련화’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 아동문학가 이원수, 시인이자 작사자인 윤해영, 무용 분야에서는 조택원, 최승희…. 재일조선인 권일, 만주에서 활동한 윤상필이나 윤익선 등이 포함된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될 친일 인사 4800명의 명단 발표 하루 전날인 28일 오후에 만난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의 말이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있었다. 조 사무총장만이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의 모두가 밤을 샌 듯 했다. 그러나 발표 하루 전인 만큼 사무실 안은 긴장감과 촉박함이 머무르고 있었다. 조 사무총장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29일 발표할 친일인명사전의 자구를 수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렵사리 자리를 마련해 그와 1시간 여 2차 명단발표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안익태·최승희·김동진·조두남·이원수 등 2차 친일명단에 수록"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이래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애초 5년 정도 계획이었는데? "사업계획이 방대했다. 지난 2001년 12월에 편찬위원회가 발족되고 2002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이 본격화됐으니깐 약 7년 동안이다. 모두들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계속해서 기간이 연장되는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렇게 방대한 작업일 줄 몰랐다. 해나가면서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우선 1차 사료도 방대했고, 지방이나 해외에서 활동한 친일파의 경우에는 자료도 부족하고 재정도 빈약했다. 민간연구소가 단독으로 추진하기에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지금도 자료는 계속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국민들에게 약속한 바도 있고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당위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 8월 말에 사전을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도 자료라든가 심층조사가 아직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1차적으로 정리하고 추가조사를 실시하려고 한다." – 이번 명단 발표에 해외 인물이 대거 들어간다고 알고 있다. "이번 발표 인사 다수가 해외와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1차 발표 때는 중앙단체에서 활동했던 인물 중심이었지만 이번 2차 발표 때는 지방유력자, 일본과 만주, 중국 관내 그리고 러시아 등에서 활동한 친일파 인물들이다." – 특히 어디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나? "만주 쪽에서 활동한 인물이 많다. 거기에는 지역적 특성이 있다. 우선 만주는 일본괴뢰정부인 위(僞)만주국이 건설된 사실상의 식민지 지역이었다. 조선인은 만주국에서 일본인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 존재였다.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에서 각종 지배층을 형성한 것처럼 조선인도 만주국 통치의 일익을 담당했다. 아류 제국주의자의 역할을 담당한 만큼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강제이주 당한 농민들이 많지만 출세를 위해 적극적으로 만주로 이주한 일제의 첨병들이 많다. 두 번째로는 만주의 구조적 환경 때문이다. 만주는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진 곳이다. 일제는 이를 타압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활용했다. 간도특설대, 신선대 등 조선인부대를 동원해 항일세력을 탄압하는데 악용했다. 이런 조선인부대에서 일제의 주구노릇을 한 이들이 수록될 예정이다." – 이번에도 일반 국민들이 알고 있는 저명한 인물들이 포함됐나. "특정 개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닌 만큼 누구를 지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지만 상당한 지도층 인사들이 있다. 새롭게 추가되는 인물 중에서 일반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분은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가곡 ‘가고파’, ‘목련화’ 등을 작곡한 김동진,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이 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시인이자 작사자인 윤해영 등도 수록된다. 무용 분야에서는 조택원도 있고 최승희도 있다. 최승희는 그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의 주민들이 석명서(釋明書 : 사실을 설명하여 밝힌 글)를 제출해 최승희가 국방헌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해 추가조사를 할 계획이다. 나머지는 재일조선인 권일, 만주에서 활동한 윤상필이나 윤익선을 들 수 있겠다." "반민족행위 청산 앞장 선 이들이 용공세력 몰리는 웃지 못할 상황"
– 이번에도 인명 수록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것 같다. 특히 29일 명단 발표를 앞두고 일부 우익단체들이 저지를 결의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한국의 소위 우익세력들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한다. 사실 반민족행위에 대해 정상적인 나라라면 우익세력이 가장 1차적으로 안고 가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독특하게 역사 바로세우기, 친일청산 등 학술운동·실천운동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용공세력으로 지탄 당한다. 해방 때부터 지금까지도 이들이 좌파로 몰리는 그런 웃지 못 할 상황이 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의 정치현실과 역사인식이 상당히 왜곡돼 있다는 반증이다." – 친일명단에 수록될 인사들에 대한 기준은 어떤가. "현재 연구소가 집적한 인물정보만 100만 건이다. 이 중에서 친일혐의자 즉 조사대상으로 삼은 모집단이 2만에서 3만 정도 된다. 이 중에서 엄정하게 선정한 것이 4800명이다. 편찬위원회나 연구소는 양쪽의 공격을 다 받게 돼 있다. 기본적으로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세력은 ‘마녀 사냥’, ‘전민족친일론’ 등 각종 궤변으로 공격할 것이다. 또 한 쪽에서는 ‘일제강점기 36년과 제국주의 침략과정까지 생각한다면 무려 40~50년 가까이 되는데 고작 5천명 밖에 되지 않냐’며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편찬위원회와 연구소는 가능한 객관적인 기준 아래 행동하고자 했다. 수록대상자를 선정하는 원칙도 확실하게 정해놨다. 자발성과 적극성. 즉 피치 못해 끌려간 것은 제외했고 반복성과 중복성, 지속성 등 얼마나 반복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부역했는지도 따져봤다. 또 교사로 넉넉히 살면서도 군 장교를 지원하는 것처럼 먹고 살 지위에 있으면서도 부나 명예를 쫓아서 친일행위를 한 이, 영향력이 큰 지식인·문화예술인들도 그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따졌다. 특히 경찰·군인·헌병 등 폭압기구에서 종사한 이들은 다른 일제 복무자들과 다르게 기준을 더 엄격하게 적용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살상하는 등 직접적인 반민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 순사나 면서기 등이 일제강점기를 체험한 세대들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겼고 명료하게 기억이 남아있지만 문헌 등 자료에서는 ‘순사를 했다’는 정도만 남아있어 구체적인 친일행위가 없다면 수록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단의 집행자들보다 상부에서 지휘하고 명령한 이를 더 주목해 구조적 책임을 묻고자 했다." – ‘친일파’를 어떻게 규정했나? "친일파는 추상적인 용어다. 그러나 친일파는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친일파는 민족반역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라 지칭하는 것은 매우 비난하는, 모욕적인 단어다. 우리는 이 ‘역사성’을 존중했다. 일제강점기 체험세대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존중한 것이다. 그래서 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와 우리가 지칭하는 ‘친일파’는 다르다. 반민족행위자는 각종 국권을 상실케 한 조약을 맺거나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은 이, 또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살상한 이들이지만 친일파의 개념은 좀 더 포괄적이다. 민족반역자는 친일파의 한 부류에 불과하다. 식민지배기구나 군·경찰 등 식민통치를 지탱하게 만든 하부구조에 복무하거나 매판지주나 매판자본가처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제의 권력에 기생한 자,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지식인·문화예술인, 이런 부류를 부일협력자로 분류해 친일파로 본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등급을 나눠 이들 중 상층부를 반민족행위자와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록했다." "정권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미래세대에게 더 큰 부담 될 것"
–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신적 뿌리는 아무래도 임종국 선생 아닌가. 얼마 전 임종국 선생의 ‘친일파총서’ 발간계획이 공개되기도 했다. "정말 우연찮게 발견됐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님은 우리의 정신적 자산인 한편, 연구의 토대를 놓아주신 분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 남겨놓으신 자료가 방대했다. 그 때 선생님의 빈소에서 그 분의 유지를 잇고자 뜻을 모았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첫 출발이 선생님이 정리하신 방대한 양의 친일인물카드였다. 그것을 주춧돌 삼아서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친일파 총서’ 계획을 살펴보면 선생님은 대략 1만명에서 2만명 내지의 친일인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셨던 고 조문기 선생도 이번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빠질 수 없는 분 아닌가. "조문기 선생께서 과분하게도 우리 연구소 직원들을 ‘밤낮 없이 싸우는 독립군’이라고 칭하셨다. 매순간이 ‘전쟁’에 가깝지만 격려가 참 많이 됐다. 이번 인명편에 불과한 사전편찬이지만, 눈 앞에 두고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 빈소에서 많은 이들이 울었다." – 최근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위원회 통폐합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권철현 주일 대사가 ‘과거사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에 대한 기류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분명히 그런 경향이 있다고 본다. 과거사위원회 통폐합의 명분으로 예산의 절감이나 효율성 추구를 내세우고 있지만 옳지 않다.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피해자 보상추진위원회의 경우 접수된 것이 수십만 건이지만 처리된 것은 4만여건에 불과하다. 모든 위원회가 지금도 인원과 재정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태다. 모든 위원회가 공히 모처럼 맞은 과거사 정리 기회를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상황이다. 과거사 문제는 정권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는 국가 정통성이 달린 문제다. 일제강점기 문제만 하더라도 60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해결하지 못한 민족사의 과제다. 현대사도 마찬가지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든 풀고 미래를 위한 모색을 할 수 있는 것인데 덮는다고 덮혀질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정리할 기회를 잃으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부담이 된다. 다시 정권이 바뀌면 다시 제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국가 전체 차원에서도 매우 소모적이고 근시안적인 사고다." – 조 사무총장께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인데, 최근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환수에 대해 행정소송을 내는 등 반발이 심해진 것도 최근의 사회 기류에 따른 것 아닌지 생각해본 적 없나? "오랫동안 상속 보유하고 있던 재산을 갑자기 환수하겠다고 했을 때 개인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재산은 대단히 반민족적이고, 부도덕한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후손이 선대의 죄를 인정한다면 이미 제정된 법이 잘못됐다고 위헌 소송하는 것은 바람직 못하다고 본다. 재산조사위원회가 주로 환수대상으로 삼는 토지나 임야는 그들이 가진 재화 중 극히 일부,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사실 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환수토록 한 법이 제정됐나.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나 제3자 소유로 돼 있는 재산을 되찾아가겠다고 소송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이 사안이 불거졌다. 시민사회가 공연히 없는 법을 만들어서 재산을 환수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친일파 후손들이 준동하면서 이 법이 추진된 것이다. 친일파 후손들이 이를 너무 소아병적으로 보지 말고 이미 후손으로서 기득권을 충분히 누린 만큼 선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접근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소송 등 역으로 문제제기를 해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해보자는 국가적 대의를 훼손시키거나 오염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금운동 통해 시민들의 관점이 매우 건강하다는 사실에 크게 감격"
– 7년 간의 편찬 과정 중 특별히 기억이 남거나 힘들었던 점은 없나? "아무래도 국민모금 운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 편찬자금 모금액을 5억 원으로 잡은 것도 그렇게까지 전개될 것이라 몰랐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 네티즌 1명이 댓글을 달면서 시작된 모금운동이 다른 언론들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국민모금운동이 됐다. 방송사에서 불우이웃돕기라든가, 재해모금운동도 이 정도로 단시일 내에 거액의 성금이 조성된 예가 없었다. 그를 지켜보면서 민족문제라던가 민족사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관점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과 다르게 매우 건강하다는 것이 감격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엄청난 책임감도 느끼게 됐다." – 현재 연구소의 재정 상태는 어떤가. "모금운동을 계기로 회원이 배로 늘어나 5천명이 넘는다. 회원들이 매월 월회비를 내주고 있는데다 연구소도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예산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동력은 회원들의 작지만 강한 힘들이다." – 마지막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 이후 계획은 무엇인가? "우선 이 사업이 이렇게 첫 결실을 내놓게 되기까지 지지해주고 곁에 있어준 국민들과 연구소 회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나 이 인명편 출간은 편찬사업의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깊은 책임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조사활동을 해 나가겠다. 또 친일인명사전을 외화하는 운동도 전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교육활동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친일인명사전 작업 전체가 학술적인데 이를 시민이나 학생들에게 알릴 현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민중생활 역사관'(가칭)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송기인 신부님이 재직 기간의 급여를 고스란히 모아 쾌척해주시는 등 기금도 모아가고 있다. 인명편 발간 이후에는 이에 좀 더 신경을 쓰려고 하고 있다."<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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