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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광복 63년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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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차형석 기자


 


민족문제연구소는 고 임종국의 뜻을 이어 1991년 설립되었다. 최근 8월에 출간할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를 발표했다. 연구소를 세운 지 17년 만이다.










 



 



ⓒ시사IN 윤무영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에서 논의를 하는 연구원들(위).


9부 능선. 그 정도 되겠다. 지난 4월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명단(4800여 명)을 발표했다. 1966년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이 나온 지 40여 년, 고 임종국의 뜻을 이어받아 민족문제연구소가 출범(1991년)한 지 17년 만이다. 그리고 전국 대학교수 1만명 서명운동 이후 2001년 편찬위원회가 구성된 지 7년 만에 사전의 최종 윤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05년 8월에 1차 명단 3000여 명, 이번에 2차로 여기에 추가해 총 4800여 명을 발표했다. 4개월 뒤면 사전이 발간되는데, 이의 제기를 받고 학계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치기 위해 미리 명단을 공개했다.

이 사전은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다른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 피해를 끼친 자’를 수록 대상으로 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전편찬실장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하나는 반민족행위자. 이완용처럼 통상 ‘친일파’ ‘매국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 그룹은 ‘부일협력자’이다. 판·검사, 고등경찰 등 관료와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지식인·문화예술인이다. 박수현 실장은 “당시 이들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했다. 단, 일제 강점기 초기에 관료에서 물러난 사람이나 나중에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제외했다. 반대로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가도 회유든 강요든 자유의지든 일제에 협력했던 사람은 포함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 추가 발표된 인사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와 <고향의 봄>을 작사한 아동문학가 이원수, 무용가 최승희 등 문화계 인사와 신현확 전 국무총리 등이 포함되었다.










 



 



ⓒ시사IN 윤무영


아래는 월간지 <반도의 빛>에 실린 아동문학가 이원수의 친일시.



박수현 실장은 인물 선정의 중요 기준으로 ‘증거주의’를 강조했다. 아무리 심증이 가더라도 당시에 발간된 1차 자료가 없으면 배제했다는 것이다. 박수현 실장은 “지금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 회고록, 광복 이후에 나온 저서들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지금도 ‘어떤 이는 악질적 고등계 경찰이었다’는 증언을 하러 오는 사람이 있지만, 1차 자료에서 근거가 나오지 않으면 제외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군사정부 시절 관변학자들이 쓴, 칭송이 가득한 ‘위인전’ 같은 서적은 자료에서 더더욱 제외할 수밖에 없다.

인물 데이터베이스 100만 건 구축

증거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의 힘’ 덕분이다. 생전에 임종국은 ‘친일파 총서’를 계획했다. 이를 위해 임종국은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관보를 찾아 수기로 개인별 카드를 만들었다. 임종국의 자료를 토대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쌓은 인물 데이터는 100만여 건이 넘는다. 초기 민족문제연구소 내 연구자가 대여섯 명에서 현재 상임·비상임 포함 30여 명으로 늘었는데, 이들은 일제강점기 원 사료 2000여 종을 뒤져 인물 정보를 구축했다. 한 명 한 명 추적하는 과정은 박수현 실장이 ‘자료의 늪에 빠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만큼 더딘 일이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당시 경찰간부기수회보에서 창씨개명한 인사를 찾으면 그 전의 경력과 이후 행적을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고, 창씨개명록을 뒤져 본명을 찾는다. 자료와 자료를 릴레이하듯 찾아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신원과 행적을 확인하는 데 1주일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원 자료의 오류를 확인하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1차 발표 명단에 들어갔던 80여 명이 제외되었는데, 20여 개 분과별로 전문가들이 심사 요건을 강화해 명단에서 제외시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원 자료의 오류를 발견한 경우가 더 많았다. 총독부 관보나 직원록에서 이름이 틀린 경우, 여러 자료를 확인하면서 오류를 집어낸 것이다. 이런 자료와 과정을 토대로 편찬위에 소속한 교수·학자 150여 명이 인물군 숫자를 줄여나갔다. 친일혐의자 2만5000여 명을 우선 추리고, 전공자의 검증을 거쳐 4800여 명으로 줄였다.










 



 



ⓒ연합뉴스


지난 4월29일, 보수단체 회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명단에 포함된 것에 항의했다.


박수현 실장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을 하면서 가장 큰 분기점을 2004년 1월로 꼽는다. 2003년 12월 국회 예결위원회에서 일제시대 기초조사 연구 관련 예산 2억원을 삭감하자, <오마이뉴스>를 중심으로 네티즌의 자발적 성금이 들어왔다. 애초 2004년 8월15일까지 5억원을 모으자는 계획이었는데, 불과 11일 만에 성금 5억원이 모였다(최종적으로 걷힌 성금은 7억여 원). 좌초하거나 매우 더뎌졌을 뻔했던 사전 편찬 사업에 수많은 네티즌이 힘을 실어준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전 집필이다. 2008년 3월 말 현재 연구자 168명이 집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전체 항목 가운데 70% 정도 집필을 완료했다. 원고는 꼼꼼한 검수 과정을 거쳤다. 편찬위는 양식에 따라 감정을 배제한 채 객관적 사실만 수록하기로 집필 원칙을 정했다. 식민지 시대의 모든 경력을 싣는다. 그리고 근거가 되는 문헌 출처를 명기한다. 친일과 독립운동을 오간 사람인 경우, 두 경력을 함께 싣는다. 광복 이후의 경력이 많은 경우는 식민지 시대 경력을 수록한 분량의 2분의 1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서술하기로 했다. 박수현 실장은 “이항녕 전 홍익대 총장의 경우 자신의 행적(일제 말 하동군수 역임)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반성했다. 이러한 사실 또한 객관적으로 기록할 것이다. 판단은 이 사전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 얘기가 나올 때마다 보수 언론과 현 여권은 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전의 정당들은 이 문제를 정치화하려고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대선과 총선이 다 끝난 지금을 발표 시점으로 잡은 데는 이런 소모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박수현 실장은 친일인명사전의 편찬 의의를 이렇게 말했다. “반성과 화해가 취지다. 반성 없이 화해로 나아갈 수 없다. 심판과 단죄하고도 거리가 멀다. 광복 직후에 했어야 할 일인데 60년이 걸렸다.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은 이제 시작이다. 이 작업이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인물 연구의 토대가 될 것이다.” 연구소는 오는 8월 말 친일인명사전 인명편을 발간하고, 이어 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와 친일 문제를 본격 해명하는 총론편, 친일협력단체 사전,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 창씨개명 사전 등 17권 분량의 총서를 낼 계획이다.<시사인, 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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