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해방이후 청산되어야 했을 친일파가 다시 친미파가 되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여 63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와서 친일의 문제를 거론한다고 해서 무엇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을 가려내어 처벌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잘못된 과거를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하여 기록으로 나마 정리하겠다고 하는데, 이것마저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펴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사전편찬 작업도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002년 국민의 정부가 기초조사에 필요한 최소한의 예산지원을 계획했으나, 국회는 이마저 모두 삭감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2001년 12월에 사전편찬위원회가 발족하여 집적한 인물정보가 무려 100만 건이며, 그 중에서 친일혐의자 조사 대상으로 삼은 모집단이 2만에서 3만 명이 된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작업의 결과로 4,776명이 확정되게 된 것이다. 이를 주도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객관성과 엄밀성을 사전편찬의 절대적 가치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토대로 올해 8월에 사전이 예정대로 편찬된다면, 민족정기를 세우는 기념비적 사건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에 대하여 불교계가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묘한 점이 있다. 그것은 불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친일 명단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현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억불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역사적 시점이 하필 일제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친일의 잣대로 일제시대의 불교계를 평가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종교적 가치와 민족적 가치가 똑 같을 수는 없다. 특히 종교지도자의 경우 부당한 정치상황이라 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이와 일정정도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역사적인 일에 불교계가 힘을 보태야 한다. 역사적으로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민족과 함께했던 것이 한국불교의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도 만해스님을 비롯하여 불교계의 많은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이후 ‘친일불교 청산’을 외치며 대한불교조계종이 탄생했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친일인명사전은 ‘민족적 관점’에서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엄밀한 기준’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작업이다. 민족적 가치와 불교적 가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는 일정정도의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설사 친일명단에 오른 스님이라 할지라도 불교적 입장에서 공이 있다면, 그러한 분은 불교계 내부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시대에 잘못한 점이 있다면 반성하고, 오해가 있는 점은 불교적 입장을 분명히 밝혀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에서 불교학자인 필자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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