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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흔적, 현재 우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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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영화평론가)


 










이 글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강성률 광운대 교수가 쓴 것으로, 칼럼 전재를 허락해 주신 컬처뉴스 측과 강성률 교수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주>


 












<IMG alt="일제 말기 지원병 제도를 선전했던 친일영화 의 한 장면. ” src=”http://www.kpaf.org/attach/tbartd010/disse3336_20080520180224.jpg”>






▲ 일제 말기 지원병 제도를 선전했던 친일영화 <병정님>의 한 장면.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상자료원이 서초동에서 상암동으로 옮기면서 개관영화제를 지난 5월 9일 개최했다. 25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많이 주목받은 영화는 이번에 새로 발굴된 <청춘의 십자로>였다. 1934년, 안종화 감독에 의해 연출된 <청춘의 십자로>는 지금까지 존재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화필름이다. 최근에 발굴된 필름도 모두 일제 말기의 유성영화였지만, <청춘의 십자로>는 무성 극영화이다. 영화 연구자들의 관심이 높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청춘의 십자로>는 변사의 공연으로 재연함으로써 관객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공연 전에 마치 무성 영화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여배우가 나와 주제곡을 멋지게 부른 후, 변사의 해설로 영화 상영을 마치고 다시 주연 남우, 여우가 같이 등장해 노래를 부름으로써, 이 영화의 개봉 당시 풍경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당시 영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이런 순서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시절을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는 색다른 구경거리이고, 그 시절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추억의 선물을 선사했다. 9일, 10일 양일간 상영된 변사의 해설은 참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나 역시 색다른 감흥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제에서 나의 눈길을 가장 강하게 잡은 것은, <청춘의 십자로>가 아니라, 방한준 감독의 <병정님>이었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관심이 <청춘의 십자로>보다 <병정님>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정님>은, 이미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일제 말기의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고 있는 친일영화이다. 친일영화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쓸 때, 이 영화는 필름이 발굴되지 않고 시나리오만 존재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방한준 감독에 대한 나의 관심도 각별했다. 1930년대 말에 그는 조선적인 색채가 강한 <한강>과 <성황당>을 통해 이미 이름을 널리 알린 감독이었으며, 최인규가 몸이 좋지 않아 후반기 촬영이 곤란해진 <집 없는 아이들>의 연출을 그가 맡기도 했다. 당시 방한준은 ‘떠오르는 젊은 감독’의 중심에 있었다. 나는 방한준의 연출력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내 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필름으로 확인한 <병정님>은 시나리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몇 부분의 추가와 삭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시나리오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시나리오와 이 영화에 관한 기사, 그리고 영화 광고 등을 통해 짐작했던 것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영화를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지원병에 대한 선전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전쟁 말기로 가면서 일본은 부족한 인력과 자원을 조선에서 착취해야만 했기 때문에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서구와 동양의 대결구도였는데, 조선은 일본과 같은,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에 완벽한 일본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서구와의 대결 구도 속에서 조선인이 사는 길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징병의 의무를 져야만 했다. 그것은 권리에 따른 의무였다. 황군(皇軍)으로 출전하는 것 역시 일본인이 된 조선인의 의무였다.








 


개봉 당시 <매일신보>에 실린 <병정님> 기사 <사진제
공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는 황군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성스러운 일인지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영화는 평범한 집에 소집통지서가 오면서 시작되고 훈련을 마친 이들이 전장으로 출전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중간의 내용은 훈련소에서 겪는 일들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정말로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영화의 대부분을 훈련소 생활을 소개하는 것에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군대에 다녀온 이들이나, 아니 다녀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군 생활만으로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군대를 코믹하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황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얼마나 재미없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감독 방한준의 연출력은 결코 만만치 않다. 지루하기 쉬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어 영화를 보는 사이 영화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영화 속에 그려진 훈련소는 가정보다도 더 포근하고 따뜻하며 위생적인, 그러면서도 전우애로 똘똘 뭉친 공간이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도 없고, 오로지 자신의 위치에서 충실한 황군이 되어 간다. 이렇게 영화는 장병이 전우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군대에 보낸 아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워하고, 마을 주민들 역시 진심으로 가족과 군인을 대한다. 그것을 방한준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그리고 있다. 그러니 연출력이 대단하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대동아전쟁을 걱정하는 모습은 후방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편이 모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 장면이 상영된 <국기 아래서 나는 죽는다> 역시 전쟁을 대하는 충실한 마음을 담고 있다. 나이 많은 마을 구장은 매우 가문 뙤약볕에서도 우물에서 물을 져서 농사를 짓는다. 그를 걱정하는 마을의 아낙네들에게 이 정도의 더위는 전장에서 고생하는 황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쓰러지고 구장의 고귀한(?) 끗을 이어받은 마을의 아낙네들이 머리에 물동이를 지고 나와 농사를 짓는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영화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전쟁의 생산력을 증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을 위해 나약한 노인이 먼저 나서야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시보뉴스는 전쟁의 후방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일들을 뉴
스 영화로 제작해 보여줬다. 시보 뉴스 <조선의 애국일> 의 한
장면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개인을 버리고 공동체(즉 국가와 대동아공영권)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은 이번에 상영된 <총후의 조선>, <조선의 애국일> <조선 우리의 후방> 같은 시보 뉴스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일제로서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전쟁 때문에 조선을 확실한 아군으로 만들어야 했다. 확실한 아군이 아닌 조선인이 전쟁에 나가면 오히려 총을 거꾸로 돌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가장 좋은 선전 매체였다. <총후의 조선>이라는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는 것처럼, 전쟁의 후방에서 국민들이 해야 할 일들을 뉴스 영화로 보여주고 있다. 중일전쟁을 위해 아낙네들이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황군을 격려하며 전쟁자금으로 비녀를 기부한다. <조선의 애국일>이나 <조선 우리의 후방>에 나타난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이 영화에 그려진 풍경은 1970년대 초중반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군인들이 퍼레이드를 하고 깃발을 들고 학생들이 행진을 하며 구호를 외치고, 국민들이 운동장에 모여 적을 규탄하거나 아군을 응원하는 모습, 평시에도 전시처럼 훈련을 하는 모습, 월남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모습은 단지 일제 말기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의 영화를 보면서 정말로 무서웠던 것은 그토록 혐오하는 일제 말기의 모습이 해방 이후 한국에도 고스란히 이식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이식된 정도가 아니라 토착화되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만주에서 일본 군사 훈련을 받았던 이가 통치했기 때문인지, 1970년대의 풍경은 일제 말기의 풍경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적이 미국에서 북한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아군과 적군이 바뀐 상태에서 전시 상태로의 국민동원체제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1970년대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였다.


이런 시절, 영화는 정책의 선전도구였다. 1970년대 영화가 그것을 강요당했던 것처럼, 당시 영화 역시 그러했다. 그런 면에서 방한준은 불행한 감독이다. 자신은 만들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방한준이 만든 영화를 보면, 대충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숱한 영화에 나타난 병영 생활의 모습은 방한준의 <병정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당시 체제에 대한 감독의 생각이 들어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화를 본 청소년들은, 마치 1970년대의 어린 내가 북한을 악마로 알고 목숨을 바쳐 싸우는 것이 정의라고 여긴 것처럼, 미영(美英)을 무찌르는 것이 정의이고 군대야말로 사나이의 모든 것을 길러주는 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전쟁에 나가 죽었을 것이다. 친일영화가 위험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친일인명사전의 명단 발표를 두고 말이 많았다. 친일인명사전은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과거를 통해 보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 가운데 파시즘적인 것을 지금이라도 밝혀서 청산하자는 것이다. 파시즘과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평화의 적이다. 그것을 지금이라도 밝혀 청산하자는 것이 왜 논란이 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뻔뻔스럽게 늘여놓는 TV 토론을 봐도 도무지 알 수 없다.<컬쳐뉴스, 08.05.20>



 *지독한 산골에서 태어난 강성률 영화평론가는 고등학교 시절 지독한 영화광이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영화관을 드나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대학원에서 영화 공부를 했고, 이후 비평과 연구의 길을 걷고 있다. 역사와 영화의 관계에 관심이 많고 현실 비판적인 영화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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