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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 소식지 「진실화해」제9호(5·6월) 특집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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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기관지 ‘진실화해'(2008. 5-6월호)에 실린 것으로 전재를 허락해 주신 위원회와 필자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주>


 


 


홍순권 동아대 교수


 


 과거사 정리는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


 20세기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식민통치와 전쟁, 그리고 독재정치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와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당하고 인권이 억압당하였다. 일제시기의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이후의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왜곡된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인간다운 평화적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노력의 결과, 1987년 마침내 우리 사회는 ‘민주화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수 있었다. 최근 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과거사 정리’ 문제는 1987년 이후 우리 사회가 성취한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는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아직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정치제도적 측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민주주의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정신적 가치는 정치제도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그와 동시에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민주화와 더불어 그 시대정신에 맞는 민주적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하여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어렵게 획득한 민주주의 제도도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재인식하여 이를 사회적으로 내면화하는 일이 ‘민주화 이후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과제로 대두하게 되었다. 1990년대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비롯하여 이후 제정된 각종의 과거사 관련법과 과거청산 운동은 그러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하기 위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운동이다. 그것을 큰 틀로써 보자면 21세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적 가치를 정립하기 위한 역사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는 과거사 관련 진상규명작업 또한 그동안 은폐되었거나 왜곡되어왔던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평화와 공존의 미래지향적 가치를 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과거의 한풀이’가 아니며, 과거사 정리를 통한 우리 사회 내부의 통합뿐만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민족적 갈등의 치유와 민족통합을 지향한다는 데 그 진정한 입법 목적이 있다.


  과거사, 즉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동물 중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다. 인간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이 반드시 즐겁고 행복한 일은 아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일이다. 비극적인 역사 경험은 개인과 집단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깊은 정신적 상흔을 남긴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흔히 트라우마라고 한다. 트라우마는 단지 피해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가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특별한 상황이 존재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상처를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저절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집단적 트라우마의 경우 공동체가 이것을 스스로 치유하지 않으면 그 상흔은 공동체 내부에 더욱 깊숙이 각인되어 공동체의 자기성장과 발전에 장애가 된다. 과거사 정리는 이러한 공동체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불행과 과오를 무조건 덮어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여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피해자를 위로하고, 가해자의 참회를 유도하여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모색할 때 트라우마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근원적인 치유가 가능하다.


과거사 정리는 미래지향적인 일


  혹자는 과거의 잘못을 뒤늦게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과거사 정리(과거청산)을 부정의[不正義]의 시정이라고 정의한다. 즉, 과거사 정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에 있었던 부정의를 바로 잡아 정의를 세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비록 과거에는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바로 잡을 수 없었던 부정의를 뒤늦게나마 교정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규명을 통한 과거사 정리가 단지 가해자를 밝혀내어 단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사건의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고 그 사건의 구조적 원인을 해명하여 사회적 제도적 차원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양자 사이의 화해를 모색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고 할 것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에 규정된 목적도 이러한 취지와 다르지 않다.


  과거사 정리를 이상과 같이 정의한다면,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정리하는 작업은 어디까지나 미래지향적인 일이다. 뒤 짚어 말하면, 과거의 진실 규명에 대한 기준이 우리 사회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미래지향적 가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 핵심 가치는 다름 아닌 ‘인권’이라는 오늘날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20세기의 전쟁과 대립을 넘어서 21세기의 평화와 공존을 지향한다. 따라서 현재 진행 중인 우리 사회의 과거사 정리는 이러한 미래지향적 가치 기준에 따라 과거에 은폐되었거나 왜곡되었던 사실 밝혀내어 재평가하는 작업이며, 그 자체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세계사적으로 21세기는 ‘과거사 정리의 세기’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과거사 정리는 결코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국사적인 특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지 지배와 전쟁, 독재 등으로 우리 사회와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또 피해자 측 뿐만 아니라 가해자 측에게도 그것은 부끄러운 과거로서 청산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가 되어 있다. 그 때문에 동남아와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물론 스페인과 같은 유럽 국가에서도 ‘과거사 정리’가 진행되고 있다. 성공적인 과거사 정리를 위해서 이들 여러 나라가 각국의 역사적 경험과 정보를 함께 공유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그러했거니와 앞으로도 더욱 더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과정이 없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가 차원에서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화해를 모색하는 과거사 정리 또한 역사에 대한 자기 성찰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의의를 지닌다.


 
























 글  홍순권 교수







– 동아대 인문대학 교수(현)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서훈공적심사위원(현)
– 부산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실무위원(현)
–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회원(현)
– 진실화해위원회 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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