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90년이자 정부수립 60돌이 되는 해이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는 제헌 헌법의 전문(‘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과 현행 헌법의 전문(‘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이 이러한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 60돌’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며, 일부 보수 세력은 아예 8월 15일을 ‘광복절’보다 ‘건국절’로 기려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이 날이 건국절이 돼야 한다는 얼빠진 주장은 한 마디로 독립운동 선열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존재를 매우 모독하는, 반헌법적인 책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선열들과 임시정부를 모독하는 사례는 또 있다. 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장소를,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중국 현지 지방정부의 말만 믿고, 엉뚱한 곳을 청사 유적지로 지정한 우리 정부와 관련 업무 종사자들의 행태가 그것이다. 더욱이 당시 현지에 거주해서 그 곳 형편을 잘 아는 독립운동가 여러 분이 청사가 있던 실제 위치를 증언하고 있음에도, 우리 정부는 무슨 까닭에서인지, 중국측이 일방적으로 지목한 장소만을 여전히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라고 공문서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에 문화관광부와 독립기념관, 한국근현대사학회는 ‘국외 항일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행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 내용에 오류가 많았다. 이를 뒤늦게 안 글쓴이는 2007년 상반기에 일부 언론과 국회 토론회를 통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정부는 2007년 여름에 문제가 된 일부 유적지에 대해 재조사를 한 뒤 그 해 12월에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글쓴이가 문제를 삼은 것들 중 몇 군데는 재조사를 통해 수정이 되었지만,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선 조사단이 현지에 갔으면서도 조사를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재조사를 한 결과 수정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뜻인지, 일절 언급이 없었다. 2002년 보고서에서 일부분이 단순히 표기와 인쇄 과정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발견 즉시 정오표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발표하고 배포해야 했었다. 아니 적어도 2007년에 발행한 2차 보고서에서라도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부와 관계자들은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그 한 예로, 정부가 2002년에 발표한 1차 보고서에서는, 1939년 4월부터 1940년 10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장소(옛주소, 기강현 임강가 43호)를 현재 중국 중경직할시 ‘기강현 고남진 상승가 27호’라고 현장 사진과 함께 기록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상승가 27호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이웃집(상승가 107호)에 살았던 신순호 여사(애국지사, 당시 18세)는, 임시정부 청사는 주택가 속에 있는 상승가 27호가 아니라, 거기서 조금 떨어진 기강의 강변에 있었고, 1990년 5월에 부군인 박영준 선생(애국지사, 당시 현지 거주)과 함께 현장을 가서 확인을 했다고 증언한다. 또 지복영 여사(애국지사, 당시 21세)도 ‘그때 임시정부 어른들께선 길 아래 강가에 집 한 채를얻어서 계셨다.’고 생전에 글쓴이한테 증언했고, 그것을 녹화한 테이프도 가지고 있다. 또 당시 청사 건물에 살았던 김자동 선생(당시 12세,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2005년 8월에 백여 명의 답사단을 이끌고 현지로 가서, 기강의 강가에 있는 청사 터(사진 1. 아파트 자리)를 확인하고 돌아온 바가 있다.
그리고 글쓴이는 2007년 1월에 이분들의 증언과 사진을 가지고 현지로 가서, 그 곳이 현재 ‘고남진 타만 8호’ 지역인 것을 확인했다. 증언 내용과 증언자가 찍은 사진과도 완전히 일치하는 지형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현재 ‘타만’이란 지명도 임시정부가 그 곳에 자리잡은 뒤 ‘임강가’로 바뀌었다가, 그 뒤에 다시 ‘타만’으로 고쳐졌다는 것이 신순호 여사와 현지인들의 증언이다.
그런데 정부가 2007년 여름에 독립기념관 연구원들을 현지로 보내 재조사까지 벌이고도 12월에 발간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가? 나중에 글쓴이가 확인한 바로는, 연구원들이 현지 지방정부 기관에 가서 관련 자료가 있는지 조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조사 보고서에 그와 같은 내용을 아예 싣지 않았다는 게 해명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중국 현지 지방정부의 말은 증거 자료가 없어도 믿으면서 당시에 현지에서 생활했던 임시정부 요인 가족 네 분의 생생한 증언은 그냥 무시해도 좋단 말인가? 그 결과, 우리 정부의 공식 문서에는 2008년 8월 오늘까지도, 1939년 4월부터 1년 6개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가 있던 중국 내 주소는 ‘상승가 27호’(지금은 재개발로 주소지 확인 불가, 사진 2)로 돼 있다.
네 분의 증언자 가운데 현재 생존하신 두 증언자께서도 고령이어서 관련 기관이 하루빨리 증언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영원히 미궁 속에 빠질 우려가 있고, 따라서 우리 국민은 엉뚱한 곳을 계속 임시정부 유적지라고여기며 기념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처럼 잘못된 기록은 내일도 학계와 언론 매체, 관련 단체 그리고 역사 서적들을 통해 국민들한테 계속 전파되고 교육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자랑스러운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유적지를 정부가 이처럼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 큰 죄를 짓는 일이다. 독립운동 선열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성실한 재조사를 통해 진실한 역사를 기록하고, 그래서 이런 실상이 ‘건국절’ 운운하는 사람들에게 책잡힐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 김자동 회장의 증언 (2008. 8. 7. 한겨레21) “임정 청사는 강변에 있었어요. 내가 소학교 5학년이던 1939년부터 2년 동안 임정 청사 바로 옆집에 살아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동녕 선생 등 임정 요인들이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곤 했지요. 나는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바로 강으로 가서 멱을 감곤 했어요. 십여 년 전에 가 봤을 때는 건물이 헐리지 않았는데, 3년 전에 갔을 때는 다 헐리고 아파트를 짓고 있더군요. 기강 부분을 보면, (정부가 발간한) 보고서를 불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학자들이 조사했다는 건데,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있을 수 없어요.”<이 글은 한겨레21(2008. 8. 17. 치)에 “임시정부 유적지는 거기 없다”란 제목으로 보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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