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서 육신의 무게만 따진다면 보잘 것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름은 한 없이 무겁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지 2098년이 지났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빛난다. 그래서 지식인이라면 자신의이름 석자를 내거는 일에 도덕관념과 행동원칙이 태산 같아야 한다.
난세에 지식인으로 살면서 이름 석자 값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옛적이나 요즘이나 많은 지식인이 이름 석자를 함부로 굴린다. 있어야 할 곳, 피해야 할 곳을 가리지 않다가 후일 망신을 산다. 개인의 망신으로 끝나지 않고 나라와 민족에 큰 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봄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한 후 두 달 동안 이의신청을 받았다. 모두 118명이 이의를 제기했는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
어느 저명한 인사의 기념사업회가 제출한 이의신청을 보자. 일제치하에서 학교를 운영했던 이 인사는 13건의 친일 글과 강연록을 남겼다.
이의신청서 내용에 따르면 이 인사는 조선청년에게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강연회에 나가 총독부에서 써준대로 읽었다. 매일신보 기자가 위의 지시라고 기고를 강요하자 알아서 대필하라고 했다. 단 그의 측근에게 원고검토를 받으라고 단서를 달았다.
기념사업회는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자 그 인사의 이름 석자 밑에 실린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이 ‘허위 날조 왜곡보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록의 무서움을 알자
이처럼 당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학교’와 ‘기업’을 살리기 위해 쓴 수백건의 친일 글은 힘없는 민초들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일제가 전쟁터로 끌고 간 조선인은 60만명이 넘는다. 이들은 징병, 특별지원병, 학도지원병, 군속, 일본군 위안부, 여자정신근로대라는 이름으로 사지에 내몰렸다. 사망자만 최소 6만명에서 최대 9만3000명을 헤아린다. 부상자는 8만4000여명이다.
이런데도 겸허한 반성과 사죄는 없고 변명이 앞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식민통치 아래서 자신과 민족의 존재를 부정했던 인사들을 엄중히 단죄하고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의 떳떳하지 못한 행적에 분칠을 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대학총장까지 지낸 분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일제 말 최남선의 학병 출정 권유는 우리 민족의 ‘군사지도자’ 양성이목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직 대학총장은 최남선의 제자다. 그것도 올해 8·15가 광복 63주년이냐, 건국 60주년이냐를 놓고 논란을 벌이는 와중에 나온 발언이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이토록 역사의 엄중함, 기록의 무서움을 경시하다 보니 한입으로 두말 하는 지식인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언론인은 시류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이름 석자가 따라붙는 기사에 엄격한자기검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권력을 좆는 철새는 왜 이리도 많은가.
엄격한 자기검열이 필요하다
줄 세우기, 편 가르기에 자기 이름을 쉽게 빌려주는 것도 잘못된 사회풍조다. 진보든 보수든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성명서 같은 것을 발표할 때 거창하게 이름을 나열한다.
단체의 강령이나 성명서 내용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이름을 빌려주는 일이 잦다. 이름을 한번 잘못 올려놓으면 해명하기도 쉽지 않다. 인터넷을 통한 확산이 너무 빠를뿐더러 이성적인 해명이 파고들 틈도 없다.
이런 난세에는 이름 석자를 내거는 모든 행위에 대해 역사가 평가를 해줄지, 또는 심판을 할지 한번쯤 생각해보면 어떨까. 이념의 양극화 시대에 생각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주장의 일관성과 언행일치는 꼭 지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소통하려는 정신만큼은 잊지 말자. 이렇게 산다면 세상에 태어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을 것 같다.<내일신문, 08.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