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역사교과서 개편 논쟁을 보면 환부역조(換父易祖)와 이이제이(以夷制夷) 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환부역조는 돈으로 족보를 사서 조상의 신분을 높인다는 뜻이다. 이이제이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정통보수를 자처하는 사람 중 상당수는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조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누린 자들과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을 외면했다는 전력도 있다. 이는 역사학계의 수십 년 연구 성과로서 의심할 것이 없다.
반민족행위자, 개발독재자의 후예들은 정통성 부족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물질적 부는 물론 진보세력이 피땀 흘리며 얻어낸 민주화의 성과물마저 만끽하고 있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은 게 세상인심이다.
몇 해 전부터 이들의 족보를 바꾸는 일에 뉴라이트 계열 일부 학자와 ‘전향한 운동권’이 앞장섰다. 이게 역사교과서 개편 논쟁의 시작이다.
교과서 바꾼다고 정통성 생기나
뉴라이트 이론의 원조 격인 한 대학 교수는 ‘현대판 친일파’라는 비난을 들어가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쳤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 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와 뿌리를 같이 하는 뉴라이트 계열이 올해 초 출간한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를 보면 친일파들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일제에‘협력’했을 뿐이다. 나아가 ‘근대국민국가’의 초석을 쌓은 선각자로 둔갑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낸 국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근대화를 이룬 혁명가로만 묘사한다. 공과를 균형 있게 평가하려는 시각은 없다.
여기에 가세한 게 일부 변절한 운동권 출신이다. 투항한 장수는 옛 주군의 목을 베어 와야 충성심을 제대로 인정받는 법. 이들이 진보학계나 민주노조의 저격수로 나선 것은 보수입장에서 보면 이이제이다.
이런 부류의 주축은 1980년대 중후반 북한방송을 청취한 후 이를 녹취록으로 만들어 대학가에 배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이 내세운 이른바 ‘품성론’‘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한때나마 많은 운동권들이 관심을 가졌다. 희망이 없던 군부독재시절의 단면일 것이다.
이 부류에는 뿌리를 달리하는 운동권도 일부 섞여 있다. 그렇지만 공통점이 있다. 운동권 출신임을 자처하면서도 대중운동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 소영웅주의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워낙 극과 극을 넘나들다 보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도 일치한다. 따라서 남북관계도 평화공존 보다는 승자독식 논리로 해석한다. 패권의 주인공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실-반성-화해’가 정도
이처럼 역사교과서 논쟁은 출발부터 의도가 불순했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 공동필자 12명 중 정치학 전공이 5명, 경제학 전공이 3명이다. 명색이 역사교과서인데 역사학 전공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도 보수의 환부역조는 과거가 떳떳하지 못한 일부 언론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속도를 내고 있다.
검정 교과서의 집필과 수정 권한은 필자에게 있다. 이번 소동의 표적은 검인정 교과서 6종 중에서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다. 일선학교에서 채택률이 56.6%나 된다. 학교운영위원회가 검인정 중에서 3종을 추천하면 학교장이 최종선택을 한다. 전교조 소속 교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수많은 역사교사를 좌파로 몰아가며 학부모와 이간질 시키려 들 것이다.
이 지경이 된 데는 역사학계도 반성할 점이 많다. 정치학자 경제계 심지어 국방부까지 자신들의 수십 년 연구성과를 휘저어 놓는데도 역사학계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인문학이 죽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는 그 존재이유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역사학계가 앞장서서 잘못된 과거사의 해결은 진실- 반성- 화해가 유일하고 바른 길이라는 점을 온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야 한다.<내일신문 ‘신문로 칼럼’, 08.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