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구호가 정치판에 회자된 적이 있다. 하지만 역사와 철학이 없는 ‘실용주의’로는 남북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다수 국민이 확인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사회가 발전하고 밥을 먹는 데 역사나 철학이 사치품은 아니다. 특히 불행한 과거사를 안고 있는 한일관계는 역사의식을 갖고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일본은 날이 갈수록 우리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 요즘 엔화 자금을 쓴 중소기업은 사망선고 직전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무역수지 흑자는 146억달러였지만 대일무역에서는 299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올해 대일무역 적자는 300억달러를 크게 넘어선다. 주력 수출품목 상당수가 일본의 부품과 소재에 의존하는 상황이다보니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벌어서 일본에 바치는 꼴이다.
대일 경제예속의 뿌리는 매우 깊다. 우리나라는 100년 전 식민지로 떨어지며 내재적 발전기회를 박탈당했다. 해방 후에는 일제에 세뇌당한 인사들이 정치 경제 상층부를 장악하며 일제잔재 청산 기회를 잃었다. 정권 차원에서 부품소재산업 육성을 외친 지 십수년이 지났지만 우리 경제의 대일 예속은 고착화되고 있다.
한일관계에서 2009~2010년은 매우 중요한 시기다. 일본 극우들의 망언 소재가 줄줄이 있어 한일관계가 더 나빠질 수 있다.
국내우익 망언이 더 걱정된다
2009년에는 3·1절 9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4월 13일),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반민특위가 와해의 길을 걸은 지 60년(6월 6일), 백범 김 구 서거 60주년(6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10월 26일)이 이어진다. 2010년으로 넘어가면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다.
일본 학계나 언론은 오래 전부터 100주년을 준비해왔다. 공영방송인 NHK는 ‘한국병합’이나 안중근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정부 관계자 입에서 ‘한국병합은 합법적’이라는 망언이 잇따라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이 최근 국제학술대회와 같은 3개년 사업계획을 세운 정도다. 특히 현 정부와 밀착된 자칭 역사전문가들의 일본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민통치는 우리에게 기회였다고 주장하는 사람, 군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역사적 자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안중근 의사를 극우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한 사람들이 ‘좌편향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난리다. 정부가 이들과 밀착되어 있는 한 경술국치는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진보진영의 움직임도 아직 미미하다. 10월 25일 일본 교토에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국병합 100년 시민네트워크’가 구성됐다. 이들이 발표한 ‘반성과 화해를 위한 시민선언문’은 한국병합이 강요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한국 측에서는 경기시민사회포럼이라는 시민단체가 일본 측 움직임에 호응해 (가칭)‘강제병합 100주년 사죄와 화해 시민네트워크’를 제안했지만 이제 시작이다.
국치 100주년 준비 서두르자
그나마 민족문제연구소가 2010년까지 경술국치 100주년 기획사업 추진, 친일파연구총서 완간, 일제강점기 민중생활역사관 건립을 3대 중점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친일파연구총서 중 인명편 3권은 내년 상반기 중 나온다.
2010년까지 4개년 사업으로 벌이고 있는 일제강점기 인적·물적 피해에 대한 통계·조사·연구사업은 올해 말까지 자료집만 45권이 나온다. 이 사업은 한일 우익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미화론을 반박하는 결정판이 될 것이다.
현재진행형인 경술국치 100주년을 어떻게 평가하고 반성하느냐에 따라서 대일 무역역조의 개선, 친일잔재 청산과 한일관계의 재정립, 북핵폐기와 북일 수교 등 민족사적 과제의 운명이 크게 엇갈린다. 정부에 기대할 것이 없다면 민간 분야에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자.
우이독경이라도 정부에 한 마디는 하자. “문제는 역사야, 이 바보들아.”<내일신문, 08.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