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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독점에서 매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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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식기획이사


경제난국을 극복할 희망은 창의력에서 나온다는 말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창의력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창의력과 독점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독점은 반시장적인 ‘공공의 적’이다. 독점을 노리는 세력의 말치레는 그럴듯해도 국가와 사회의 공동이익은 관심 밖이다. 오로지 일신과 가문의 영화를 꾀할 뿐이다.

우리 역사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1575년 동인과 서인으로 대립한 이래 1910년 한일합방까지 335년간 당쟁을 벌였다. 당쟁에서 밀리면 권력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사화가 한번 일어나면 수십 수백명의 목숨이 떨어졌다.

조선 중후반기 권력과 부, 언로를 독점했던 당파는 노론이다. 일시적으로 정권이 바뀌고 일부 군주가 탕평책을 썼다고는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300년 간 조선은 노론의 세상이었다.

정적을 죽이면서 지켰던 독점의 결과는 어떠했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내부 협조자는 주로 노론 출신이었다.

‘조선귀족약력’은 조선총독부가 통치 자료로 삼기 위해 작성한 내부문서다. 이 문서는 일제가 작위를 수여한 77명(거절자 7명 포함)의 출신과 성향을 분석해 놓았다.

출신을 보면 노론 56명, 소론 7명, 북인 2명이며 남인은 전무했다. 나머지 대부분도 왕실과 외척이다. 을사오적 중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이 노론이다. 매국노 송병준도 노론이다.


상식을 벗어난 친일의 결과


노론은 자신들이 집권해야 나라의 질서가 잡힌다는 독선적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일제 앞에 서슴없이 무릎을 꿇었다.

권력에서 오랫동안 소외된 탓에 가진 것이 적고 대의명분이 강했던 남인 계열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온 것은 필연이었다.

이를 실증적으로 살펴보자. 조선조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는 노론의 뿌리인 서인의 영수였다. 윤두수의 8대손에 윤씨 형제가 있다. 이들이 소속된 정파는 노론이다.

형은 구한말 법무·군무대신을 지냈으며 일제로부터 남작과 은사공채를 받았다. 아들 3형제 모두 미국과 영국에 유학을 보낼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해방 후에도 형 윤씨의 아들들은 대사, 병원장을 지냈다. 손자와 손녀사위 중에 장관이 두명 나왔다.

동생은 구한말 육군참장을 지냈으며 6형제를 두었다. 이들 중 두명이 일제 중추원 찬의와 참의를 지냈고, 또 하나는 임전보국단 같은 각종 친일단체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동생 윤씨의 아들 하나는 민주공화당 당의장을 지냈다. 손자 중에 대통령과 서울대 총장, 국립의료원장이 나왔다.

윤씨 형제의 증손자나 그 아랫대에도 학계 관계 언론계 재계에 내로라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주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윤씨 형제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친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윤씨 형제나 그 아들들이 일제에 저항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 손자들의 삶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외국유학은 커녕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독점은 정의와 상식을 배격한다.


희망은 ‘和而不同’에서 나온다


마침 ‘교수신문’이 설문조사를 통해 새해 ‘희망의 4자 성어’를 선정했다. ‘和而不同’이다. 논어 자로편 ‘和而不同 同而不和’에 나오는 말이다.

신영복 선생은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고 공존하지 못한다’라고 재해석했다.

요즘 이념법안, 민생법안, 미디어법안을 둘러싼 논란도 그 본질은 권력 부 언로의 독점 또는 공정한 분배의 문제다.

그런데도 “경제가 어려운데 왜 싸움질이냐”라고 한마디 내뱉고 마는 양비론은 아주 위험하다. 어느 법안이 독점과 지배를 노리는지, 또 어느 법안이 공존과 다양성을 추구하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볼 때이다.<내일신문, 0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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