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는 ‘경제적 업적이야말로 기업의 으뜸가는 책임’이라고 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적어도 자기비용에 상응할 정도의 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무책임하며,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신년 초 며칠 동안 대부분 일간신문의 1면 하단은 대기업 광고로 채워졌다. 그러나 올해는 삼성조차 1면 광고를 싣지 않았다.
신문의 가구 정기구독률은 1996년 69.3%에서 2008년 36.8%로 추락했다. 피터 드러커의 주장을 따르면 신문기업의 존립 근거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셈이다.
신문의 위기는 공급과잉과 공공성 상실에서 시작됐다. 중장기적으로는 변화하는 미디어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면한 위기를 넘어설 비상구는 있다. 민주화 과정에서 신문의 역할이 컸던 한국 사회는 신문기업에 ‘공공성’이라는 면책조항을 폭넓게 인정해주고 있다.
신문의 공공성은 무엇인가? 이 대목에서 다시 피터 드러커의 말을 인용하자. 그는 기업의 사명과 목적을 ‘고객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2월 국회에서 미디어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미디어법안 개정이다. 업계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정치적 이해관계도 민감하다. 그럴지라도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고객이 판단을 내릴 근거, 즉 ‘상식’에 기초한 ‘사실’을 제공해야 할 책무가 있다. 만약 언론이 사실보도를 외면하고 정치구호성 보도, 왜곡·허위보도를 일삼는다면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신문의 존립 기반 바닥 드러나
따라서 미디어법안을 둘러싼 2차 대결은 ‘사실’에 대한 규명에서 시작해야 한다. 1차 충돌과정에서 대부분 언론은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을 선택해서 강조하는 보도행태를 보였다. 일부 언론이 온전한 정보를 제공하려 했지만 다수 고객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객들은 신문방송겸업에 관련해서 온전한 정보를 얻기를 원한다. 미국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겸업을 허용하는지, 여론독점에 따른 폐단은 어떻게 방지하고 있는지, 겸업을 허용하면 정말로 2만1000개의 고급 일자리가 늘어나는지, 그들의 월급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대기업들이 국내광고예산을 계속 줄이고 있는데 겸업을 허용하면 방송광고매출이 늘어난다는 근거가 무엇인지 사실을 알기 원한다.
제대로 된 기자라면 끊임없이 사실을 추구하고 의심해야 한다. 오랫동안 기자생활을 한 소설가 김 훈은 장편소설 ‘칼의 노래’ 첫 문장을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라고 썼다가 며칠 고민 고민 끝에 ‘꽃이 피었다’로 고쳤다. 전자가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진술한 언어라면 후자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라는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의미의 세계와 사실의 세계를 구별’하려 했던 그는 이를 ‘하늘과 땅 차이’로 보았다.
미국 내 저명한 언론인들이 1997년 결성한 CCJ(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는 신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복수의 투명한 취재원, 관점의 다양성, 복수의 이해당사자 활용이라는 3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위원회는 해마다 미국신문들이 세가지 요소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를 조사해서 발표한다. 물론 이런 노력을 거친다 할지라도 언론마다 이해관계와 당파성은 여전히 남는다.
한국형 평가모델 고민해봐야
신방 겸업을 하면 재벌이나 거대신문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게 되는지, 아니면 겸업으로 미디어산업이 발전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의 영역으로 돌리면 된다. 의견에는 역사적 소명의식과 일관성, 그리고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어야 한다.
언론이 이런 보도태도를 가져야 생각이 다른 고객도 설득하고, 사회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객을 무시하는 보도행태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나라도 언론보도를 평가하는 한국형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
가령 미디어법안, 용산화재참사 등에 관련해 온전한 사실제공, 다양한 취재원 활용, 의견의 일관성, 약자와 소수에 대한 배려를 계량화하는 평가지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미디어 이용자의 주권을 고민하는 언론인과 언론학자들이 나서야 한다.<내일신문, 09.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