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시베리아의 통한(痛恨), 60년만의 해원(解寃)
–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행사 개최
31절 9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한 서린 비화가 전시회로 재조명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관하고 한국시베리아삭풍회ㆍ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이번 전시회는 2월 27일부터 3월 15일까지 국회도서관 2층에서 열리며, 일본군 출신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을 맞아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대국민 홍보사업의 하나로 추진되고 있다.
전시회 개막식에 앞서 27일 오후 2시부터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시베리아 억류자 귀환 60주년 기념식이 진행되며, 여기에는 이병주 시베리아삭풍회 회장 등 한국측 생환자와 유족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국회의원 등이 참석한다. 일본 쪽의 관심도 높아 일본의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대표학자 및 시민운동가일본 민주당 국회의원 등 다수가 방한단을 구성 참석하며, NHK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동행 취재한다.
귀환 60주년 기념행사 이틀째인 28일 12시에는, 귀환 도중 총격으로 사망한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를 위한 위령제가, 사고 현장 인근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38선 기념탑 앞에서 엄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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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자란 일제강점기 말 징병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 수용소 생활을 하며 수년간 가혹한 강제노동에 복역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1945년 8월 6일 선전포고 후 밀고 내려온 소련군과 대치하여 전투를 치렀다. 당시 일본 관동군은 무차별 강제동원된 초년병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그 가운데 약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는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장비나 사기, 모든 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관동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궤멸하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소련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만주 일대에서 포로가 된 관동군 출신이 시베리아 억류자의 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홋카이도 북쪽의 사할린과 쿠릴열도 등 도서지역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조선인들도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귀향의 꿈에 부풀어 있던 그들에게는 실로 기가 막힌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귀국 길인 줄만 알고 배에 올랐던 이들은, 극동 시베리아의 소련군항에 짐짝처럼 부려졌다. 관동군과 마찬가지로 기약 없는 고통의 세월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포로수송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각지에 끌려간 이들은 평균 영하 40-50도의 혹한과 굶주림 속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고, 오직 고향으로 귀환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일본군 포로의 경우 1946년 가을 소위 ‘미소협정’의 체결로 그해 12월 5일부터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정작 억울한 피해자인 조선인 포로에게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미군정의 무관심으로 차일피일 미루어지던 조선인 송환은 1948년 5월에 이르러서야 해결을 보게 되었고, 억류자들은 1948년 12월 30일경을 전후로 몇 차례에 걸쳐 북한을 경유하여 38선을 넘어 귀환하게 됐다.
무려 4년간의 지옥 같은 억류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귀환하는 길도 이들에게는 사선을 넘는 험난한 과정이었다. 1948년 말 이미 조국은 남과 북의 정부수립으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된 상태였으며, 삼팔선에는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내 나라 내 땅’이라는 믿음 하나로 삼팔선을 넘어 오던 이들을 맞이한 것은, 따뜻한 위로와 환영이 아니라 요란한 총성이었다. 전장과 수용소라는 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았던 젊은 청춘들이, 고향땅을 눈앞에 두고 남측 경비대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살아서 삼팔선을 넘은 이들에게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경위는 묻지도 않고 단지 적성국인 소련에서 4년 만에 돌아왔다는 사실과 북한을 통과하여 남하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은 다시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온 사회가 외면하는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이다. 석방 후에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어 감시당하는 등, 한번 찍힌 낙인은 무고한 이들의 평범한 삶을 기구한 운명 속으로 몰아갔다.
거의 온 생애에 걸쳐 박해와 소외를 견디어 온 생환자들은, 이제 여든이 넘은 고령으로 울분과 회한 속에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1992년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자신들의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2003년 6월 12일 한국인 군인군속 생존자와 유족 164명을 대표해, 고령의 피해자 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시베리아 억류기간 중 받지 못한 미불임금의 반환과 손해배상 등 17억 5천여만 엔을 청구하는 소송을 일본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2006년 1심에서 패소했으나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고 반인도적 전쟁범죄와 부당한 처우가 존재하였음이 명백한 이상, 앞으로도 이들의 법정투쟁은 대를 이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락처 : 민족문제연구소 전화 969-0226, 전송 965-8879 |
국내
<생존자 및 강제동원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유가족> 시베리아 억류피해 생존자 이병주 시베리아 삭풍회 회장 외 피해자유족 10여 명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희자 외 강제동원피해자유족 20여 명
<국회의원> 강창일, 송영길, 이미경, 이정희, 이종걸 국회의원
<기타 내빈> 김효순 한겨레 신문 대기자, KBS 탐사뉴스 이진성 기자 등 언론인
일본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 대표> 池田幸一(시베리아 입법 추진 회의 간사·오사카) 菊地敏雄(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 이사·도쿄도연합) 松原恒雄(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 이사·도쿄도연합)
<국회의원> 今野 東(민주당 국회의원, 참의원)
<학자 및 시민운동가> 白井久也(日露歷史硏究센타 대표·도쿄) 有光健(전후보상네트워크 간사 대표·시베리아 입법 추진 회의 간사) |
<시베리아 한인 억류자란?>
1. 문제제기 일제강점 말기 만주, 사할린 그리고 쿠릴열도 등지에 군인과 군속으로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제 패망과 함께 소련에 억류되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본인 포로와 함께 시베리아에 억류된 조선인 포로들은 특히 관동군으로 강제 징집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하루아침에 소련의 포로 신분이 된 이들은 장기간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그 결과 많은 조선인들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사망했고, 나머지는 4년 후에나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들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왜 소련 포로로 끌려가야 했는지, 시베리아에서 과연 무슨 일을 했는지,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들이 구사일생으로 생환한 지 60주년을 맞아, 늦었지만 이제껏 외면당해 왔던 시베리아 조선인 포로문제를 조명해 보고, 우리사회가 안고 풀어가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환기시키고자 한다.
2.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 된 관동군, 그리고 조선인 포로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이때 중국 동북부의 만주를 점거했던 일본 관동군은 무차별 강제동원 된 퇴역군인이나 초년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정예부대는 태평양전선에 투입된 상태였기 때문에 만주에 남아있던 일제의 전력은 군수물자와 인력의 절대 결핍으로 매우 부실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만주와 조선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제 징집을 실시해 만주 관동군에 배치시켰던 것이다. 이때 강제동원된 조선인 청년들은 약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를 헤아린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징병 2기 즉 1945년 8월 초에 이들은 대소(對蘇) 최전방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북만주 국경부근의 손오(孫吳)에 다수가 배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군 포로 출신자들의 모임인 ‘시베리아 삭풍회’ 회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손오부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옥쇄를 각오하고 소련군 탱크로 폭탄을 들고 돌격하는 훈련을 받았다.
“부끄러움(恥)을 아는 자는 강하다.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말고, 죽어서 죄인의 오명을 남기지 말라”라는 군인수칙 ‘전진훈’을 철칙으로 여겼던 일본군은 항복을 금지하고 병사들을 무모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옥쇄, 집단자결, 할복 등 무항복주의가 빚어낸 참상을 초년병이었던 조선인들 다수가 목격했다.
그 외에도 당시 만주에는 1931년 만주사변 이래로 대거 이주하였던 만주개척단 거주 일본인도 130만 명이나 있었다.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이들도 결국 소련군의 포로로 전락하였다. 관동군에 소속된 조선인들은 일본군의 일부로 취급받았다. 시베리아 포로수용소로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간 것도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일원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종료와 함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를 비롯한 소련 각지로 끌려갔던 일본인은 무려 64만 명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다양한 성분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전투 군인뿐 아니라 만주 및 몽골지방의 개척단 농민들, 만주국 관리,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 종업원, 만주협화회 회원 등이 주된 구성원이었다.
3. 소련 포로수용소와 강제노역 소련군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는 강제 징병으로 끌려온 조선의 청년들도 예외 없이 전쟁포로로 취급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들을 태운 열차는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럽, 러시아, 외몽골의 2,000개소에 이르는 수용소를 향했다. 포로수용소의 분포를 보면 동쪽으로 연해주 각지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모스크바 근교, 흑해 주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일제 관동군 가운데 요녕성, 길림성 일대의 남만주와 동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조선인들은 전쟁 종료 직후 대부분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하나, 손오와 치치하얼 등 북만주 주둔 소속 조선인들이 대부분 일본군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1만에서 1만 5천 명 정도로 파악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포로수송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 각지에 끌려간 강제 억류자들은 월평균 영하 40도를 기록하는 혹한 속에서 300g의 흘레바(소련 주식인 검은 빵)와 설탕 약간, 죽 한 그릇으로 연명하며 석탄채굴과 삼림벌채, 주택과 도로 건설 등 소련의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되었고 3∼4년에 걸쳐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강제노역에 혹사당하게 된다. 이들은 정해진 한 곳에서 계속 노역을 한 것이 아니라 수용된 지역의 형편과 작업정도에 따라 시베리아 각지를 전전하면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속 강제노동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 등으로 전체 억류자 중 약 10%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조선인 사망자 수는 대략 71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측 조사와 연구에 의하면 이들은 소련과 일본의 밀약으로 자신들이 전쟁배상을 대신하여 억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조선인포로의 귀환 추위, 기아, 강제노동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이들은 오직 고향으로 귀환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일본인 포로의 경우 1946년 가을 소위 ‘미소협정’의 체결로 그해 12월 5일부터 귀환이 시작되었으나, 조선인 포로는 미군정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송환이 미뤄지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조선인 포로들은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소련 당국에 수차에 걸쳐 귀국 허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소련 당국은 한국에는 정식 정부가 없으므로 교섭 상대자가 없어 귀국시키지 못하겠다고 이들의 청원을 거절하였다.
조선인들의 포로 송환은 일본군 포로 속에 섞여 1948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집단적으로 귀환한 것은 1948년 말이었다. 귀환하는 조선인들은 하바로프스크에 집결한 뒤 열차편으로 연해주 동부 남단에 위치한 나홋카 항구로 이동하여 이곳에서 소련 화물선인 귀국선을 타고 1948년 12월 20일 흥남으로 귀환하였던 것이다. 이 때 귀환한 조선인은 2천 1백 61명이었다. 물론 다른 경로로 귀국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북한 출신자들은 흥남 도착 직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한과 만주 출신의 귀환자들은 40일 정도 함흥에 수용되어 있다가 출신지별로 귀향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남한 출신 500명 정도는 38선을 넘어 귀환하였다.
이미 조국은 남과 북에 분단국가가 수립된 상태였고, 우여곡절 끝에 38선을 넘어 귀환한 이들은 해당 경찰서에서 모두 인천 송현동에 있는 전재민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이곳 수용소에서 다시 조사를 받은 후 비로소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적성국인 소련에서 4년 만에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로 낙인찍혀 다시 수용소에 갇히고 석방 후에도 감시당하는 웃지 못 할 기구한 경험을 겪기도 했다.
5. 시베리아 억류 피해보상과 미불금 임금 지불 소송 제기 일본군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들은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소련, 그리고 연합군사령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철저하게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시베리아에 강제 억류되어 잔혹한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귀환 후에도 남북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 대치 상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중첩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모두 80세가 넘은 고령의 생존자들은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의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이어왔다. 2003년 6월 12일 한국인 군인?군속 생존자와 유족 164명을 대표해 고령의 피해자 2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시베리아 억류기간 중 받지 못한 미불임금의 반환과 손해배상 등 17억 5천여만 엔을 청구하는 재판을 일본 동경지방재판소에 제기한 바 있다. 2006년에 1심에서 패소했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
No. |
소재 |
가공 |
제목 |
비고 |
1 |
현수막 |
열재단 |
기념식 현수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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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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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현수막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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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PET |
X-배너용 타공 |
X-배너 / 5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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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유포지 |
5mm검정 폼보드에 배접 |
소련의 참전 – 소만 국경지도 소련군의 진격 |
지도 |
2 |
– 국제정세 (얄타, 포츠담 회담 등) |
설명 |
3 |
– 소련의 진격 양상 |
설명 |
4 |
일본의 패망 – 패망 직전 |
설명 |
5 |
– 종전 선언과 전후 처리 |
사진 |
6 |
– 만주 기병(棄兵), 기민(棄民)정책 |
사진 |
7 |
조선인 징병 – 징병제 실시 |
신문 |
8 |
– 임시소집령과 전진훈 |
자료 |
9 |
– 관동군 배치도 |
지도 |
10 |
황군이 된 조선인 – 징병검사 |
사진 |
11 |
– 환송 |
사진 |
12 |
– 훈련소 입대 |
사진 |
13 |
– 부대생활 |
사진 |
14 |
시베리아로 가는 길 – 이동경로 |
지도 |
15 |
시베리아 억류자 규모 – 국적별 억류자 수 |
표 |
16 |
포로에 대한 처우 – 헤이그 군법회의/제네바 조약 |
설명 |
17 |
시베리아 수용소 – 라게리 분포도 |
지도 |
18 |
– 수용소의 형태 |
사진 |
19 |
강제노역의 종류 – 지역별 사례 |
설명 |
20 |
노동환경 – 지역별 자연환경 |
설명 |
21 |
– 작업장별 환경 (증언) |
사진 |
22 |
의식주 – 하루 끼니 (증언) |
사진 |
23 |
의복 (증언) |
사진 |
24 |
수용소 (증언) |
사진 |
25 |
위생 – 신체검사 (증언) |
사진 |
26 |
– 병, 의약품 (증언) |
사진 |
27 |
– 위생상태 (증언) |
사진 |
28 |
– 사망자 규모 (증언) |
사진 |
29 |
– 시신 처리 (증언) |
사진 |
30 |
– 유골 문제 |
설명 |
31 |
향수 – 고향에 대한 그리움/송환신청 (증언) |
사진 |
32 |
망향가 (증언) |
사진 |
33 |
– 고향에 부친 엽서 (증언) |
사진 |
34 |
노동증명서 – 개인별 노동증명서 |
사진 |
35 |
– 미불임금 규모 |
설명 |
36 |
귀환 – 귀환 경로 (증언) |
지도 |
37 |
귀국선 |
사진 |
38 |
국내 귀환 – 시베리아 귀환자 소식 |
신문 |
39 |
– GHQ 보고서 |
설명 |
40 |
– 사례별 소개 (증언) |
설명 |
41 |
억류기간 – 일본인 VS. 한인 |
설명 |
42 |
진상규명 – 사망자 명부(러시아 포로카드) |
사진 |
43 |
– 일본, 한국정부에 대한 탄원, 진정 |
자료 |
44 |
– 일본측 답변 |
자료 |
45~47 |
– 재한군인군속 재판 제기(1~3) |
자료 |
48 |
–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특별법제정 |
자료 |
49 |
– 피해신고 |
자료 |
50 |
오늘의 초상 – 생존자 소개 |
사진 |
1 |
쇼케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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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관련 유물 – 천인침, 무운장구 조끼, 천인력의 일장기, 장행기, 군인수첩, 봉공대 등 |
자료 |
2 |
|
일본군 관련 앨범 사진 자료 – 만주주둔 일본군 기념앨범류 |
자료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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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피해 진상규명 활동 관련 자료 – 탄원서, 원고 진술서, 판결문 등 |
자료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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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억류 포로 체험기 관련 자료 4~5종 |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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