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일부터 국회도서관 2층 로비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피해자 가운데 시베리아 억류라는 이중피해를 겪은 이들의 한 서린 체험을 증언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강제징집이나 징용, 강제연행일본군위안부 피해 사례는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직도 세상의 무관심 속에 묻혀 외면당하고 있는 비극적 사연의 주인공은 시베리아 억류 피해자들이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말기 징병징용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에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 포로수용소에서 수년간 강제노동에 복역했다.
일본군 신분으로 시베리아에 강제로 끌려갔던 조선인 포로들은 패전국 일본과 승전국 소련, 그리고 연합군사령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 철저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방을 맞이한 상황에서도 시베리아에 강제 억류되어 가혹한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귀환 후에도 남북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 대치 상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중첩된 고통을 당했다.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으로 분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은, 해방을 맞아서도 자기 뜻대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포로 신분으로 수용소에 강제 억류되었다. 소련 당국에 우리는 조선인이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독립국가가 수립되기 전이어서 교섭대상이 없다는 이유로 귀환을 거부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미군정도 이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1949년 경 겨우 귀국선을 타게 된 이들은 이미 분단되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던 삼팔선을 넘어 귀환하다 총격을 당해 일부가 숨지는 참극을 겪기도 했다. 살아서 삼팔선을 넘은 이들도 다시 수용소에 억류되었으며, 석방 뒤에도 사찰 대상으로 시달림을 당하는 냉전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60년 가깝게 적성국인 소련에 억류되었던 사실을 숨기며 살아왔던 고령의 생존자들은 <한국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억울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투쟁을 해왔다. 1993년 처음으로 러시아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았고, 러시아에 보관 중인 포로명부에서 3천여 명의 조선인 명단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전후보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자신들의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을 위해 오늘도 싸우고 있다. |
아흔을 앞둔 고령의 시베리아 억류 피해 생존자들의 역사는 바로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프고 고단한 삶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전시회에는 이들이 왜 천황의 군대로 끌려갔는지,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왜 돌아오지 못하고 시베리아에 억류당했는지, 이 문제가 50여 년 동안 외면당하다가 어떻게 진상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는지가 전시패널을 통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는 강제동원 당시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던 일장기, 무운장구를 기원한 천인침, 군인수첩과 봉공대, 만주점령군 군대앨범 등 실물자료들을 통해 침략전쟁 말기의 광기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시베리아 체험기를 직접 기록한 고(故) 이규철씨의 육필원고가 처음 공개되고,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와 한국정부를 상대로 진상규명 피해보상을 촉구한 진정서서신 등도 전시되고 있다.
2월 27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된 귀환 60주년 기념식과 전시회 개막식에는 병든 노구를 이끌고 10명의 생존자가 참석했다. 한국시베리아삭풍회 이병주회장을 비롯한 김기룡, 박수복, 박도흥, 원봉재, 이재섭, 이태호, 이후녕, 정원구, 황희성회원은 전시품들을 돌아보며 자신들의 억울하고 외로웠던 지난날을 기억해주고기록하는 전시회가 늦게나마 열리게 된 것에 감격해 했다.
일본에서도 일본시베리아억류 피해보상을 위한 입법추진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곤노 아즈마(今野 東) 일본 민주당 참의원과 일본 피해자단체인 일본전국억류자보상피해협의회 대표들인 이케다 고우이치(池田幸一), 마쯔바라 쯔네오(松原恒雄), 키쿠치 도시오(國地敏雄), 그리고 사무국장 아리미츠 겐(有光 健), 일러역사연구센터 대표 시라이 히사야(白井久也) 씨가 참석해 시베리아 억류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한일연대의 의지를 표명했다.
일본 억류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전후보상 운동은 올해로 30년을 맞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피해와 체험을 기록한 시베리아 억류 관련 도서는 2천여 권에 이른다. 그러나 국내에는 시베리아 억류 체험수기나 관련 연구서가 전무한 실정이다. 유일하게 지난 2005년 안타깝게 작고한 이규철씨의 육필 수기 ‘시베리아 한(恨)의 노래’가 남았을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올해 이 육필원고를 정리해 시베리아 억류 체험기를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