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전 오늘 벽초 홍명희(1887~1968)가 운명했다. 벽초는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후 북한 내각의 부수상을 지냈고, 한국문학사상 최고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소설 ‘임꺽정’을 쓴 문인이다.
벽초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 동부리다. 그가 태어난 고택은 괴산군이 매입하여 작년에 복원공사를 마쳤지만 ‘괴산 동부리 고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1919년 이후 벽초 일가가 살았던 괴산군 제월리 옛집을 문화재청이 3년 전 문화재로 등록예고를 했지만 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됐다.
1998년 제월리에 세워진 홍명희문학비는 2년 후 동판을 뜯어내 문구를 고치는 난리를 겪었다. 사계절출판사는 매년 가을 괴산에서 홍명희문학제를 여는데 작년이 13회째였다. 작년에는 괴산군이 ‘벽초 신인문학상’을 제정하려다 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자녀의 기록에 따르면 벽초는 말년에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벽초의 아버지는 홍범식(1871~1910) 선생이다. 금산 군수로 있던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날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나는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벽초가 일제 하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다. 그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를 이끌었다. 벽초와 함께 ‘조선 3재’라 불렸던 최남선 이광수가 일찍이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벽초는 해방 직후 중간파를 결집하여 민주독립당 당수를 맡았다. 벽초는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귀환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부수상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벽초에 관련된 요즘 소식이 눈길을 끈다. 최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벽초가 상속권자인 16만평에 달하는 땅을 국가환수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벽초의 조부 홍승목(1843~1925)의 친일행적 때문이다. 홍승목은 구한말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을 냈다. 홍승목은 1907년 2월 대동학회(大東學會) 부회장을 맡았다. 대동학회는 전직 고위관리들이 모인 친일 유교단체로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총회 때 그를 초청하여 연설을 하도록 했다.
홍범식이 순국한 후에도 홍승목의 친일행적은 이어진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지냈으며, 1912년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죽어서도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일가
그러나 제월리 땅 전부가 ‘친일의 대가’로 홍승목이 처음 마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벽초의 증조부로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길이 괴산에 집과 선산을 처음 마련한 때는 1860년 무렵이다. 국가환수에 앞서 홍우길과 홍승목의 재산에 대한 구별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주말 제월리를 다녀왔다. 벽초의 땅은 말이 좋아 16만평이지 임야와 그 사이사이에 조성한 옹색한 계단밭이 대부분이다. 관리가 안돼 사실상 다시 임야로 변한 지목상 밭도 많다.
벽초 일가의 비극과 영광이 중첩된 삶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다. 한 시대 두 삶을 살아야 했던 벽초 일가는 죽어서도 한자리에 모이지 못했다. 벽초의 조부, 부친, 생모와 계모는 제월리에 묻혔다. 벽초가 4살 때 홍범식과 결혼한 계모 조씨, 그리고 제수 김씨는 월북을 마다하고 향리에 남았다가 6·25전쟁 때 월북자의 가족이라 하여 사살됐다. 벽초는 부인 민씨와 함께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벽초가 죽은 지 4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우리 사회가 과거에 겪은 갈등의 진실을 밝히고, 아픔을 치유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가늠자가 되고 있다.(<내일신문>, 2009.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