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에게 지난 해 촛불시위는 희망이자 재앙이었다. 대선 이후 갈 길을 못 찾던 진보진영에게 ‘롱테일’의 법칙이 관철되는 대중운동은 분명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좌편향된 일부 진보세력들은 이 희망을 재앙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우매한’ 중고등학생들이 열어놓은 놀이판을 ‘지도’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강박감에 빠졌던 것 같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주변사람들을 둘러싼 추문은 진보진영에게는 대재앙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얼굴이 뜨겁고, 뒤통수가 간지럽다. 그들은 역사는 쉼 없이 전진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을 배신했다. 그 후유증은 크고 깊을 것 같다.
진보 또는 좌파들의 도덕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그렇지만 자칭 ‘잃어버린 10년’ 동안 할 건 다 하고 살아 온 정치인,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게 능사인 일부 언론의 놀림감이 되는 것은 정말 참기 어렵다. 어찌하겠는가. 국민에게 외면당한 진보진영의 처지는 이렇게 비참하다.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진보진영이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뼈저린 반성과 혁신, 그리고 도덕성 회복이 필요하다. 언제나 권력이라는 괴물은 범죄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금권과 권력의 비리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의 역할은 그 어느 정권에서도 필요하다.
요즘 시민단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검찰이 환경활동가 최 열씨를 감옥에 넣고 싶어 조바심을 내고, 일부 환경단체 실무자들이 횡령이라는 범죄를 저지르자 기업들은 시민단체에 후원금 내기를 꺼려하고 있다. 행정자치부가 폭력시위 전력이 있는 시민단체에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자, 시민단체들도 지원금 신청을 일제히 거부했다.
우리 사회에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 기부는 자선활동으로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시민단체 활동을 지원하거나, 전업 활동가를 후원하는 사업을 ‘아름다운 재단’이 해왔는데 그 규모가 전체 사업의 10%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올해는 아주 어렵다고 한다.
‘아름다운 재단’이 좋은 제안을 했다. 전업 시민단체 활동가를 돕는 기금을 만들자는 것이다. 1년에 1000만원만 있으면 시민단체 활동가 두 명이 휴가를 갈 수 있다. 무작정 놀 수도 있고, 해외에 나가 견문을 넓힐 수도 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공부한다’ ‘일한다’에 높은 가치를 두고 ‘논다’를 경시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채우려면 먼저 비워야 하는 법이다.
‘미래마당’이라는 친목모임이 있다. 70년대 중후반 학번들로서 직업은 다양하지만 과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1000만원을 갹출해서 ‘미래마당기금’을 만들기로 했다. 회원 각자 형편에 따라 10만원에서 100만 원 정도를 내면 종자돈 마련은 어렵지 않다. 일부 회원은 앞으로도 매달 만 원씩 자동이체를 할 생각이다. 기부금은 소득공제도 된다. 이들은 5월 정례모임에서 아름다운재단에 기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아름다운재단에는 조건 없이 1% 기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돈을 합치면 해마다 10년 경력을 가진 시민단체 활동가 여러 명이 신나게 놀 수 있다.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한다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가 생존하려면 내부 검열수준을 더 높여야 하고 도덕성 기준을 더 엄격히 정해야 한다. 다수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전문성도 키워야 한다. 재정자립도를 높이려면 사회적 가치도 있고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를 시장에 파는 마케팅 능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서 남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진보를 자처하면서 작은 일은 시시해서 못하고, 큰일은 능력이 안돼서 못해서는 곤란하다. 작은 기부가 세상을 바꾸는 첫걸음이 된다는 소박한 믿음을 실천으로 옮길 때이다. 필자도 이 글의 원고료를 기부하려고 한다. 아름다운재단 연락처는 www.beautifulfund.org(02-766-1004)이다.<내일신문 『신문로칼럼』 , 09.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