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길 것’ |
이규봉(대전지부장배재대 교수) |
이규봉 대전지부장은 시민단체 ‘나와우리’ 후원 회원자격으로 4월 6일부터 12일까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Quang Ngai)성을 다녀왔다. 이 글은 답사를 마치고 쓴 것으로 오마이뉴스에도 실렸다. – 엮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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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증오비(또는 죄악증거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1966년 12월 5일 정확히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 청룡여단 1개 대대가 이곳으로 행군을 해왔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모두가 참혹한 모습으로 죽었고 겨우 14명만이 살아남았다. 미제국주의와 남조선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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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중부 지역은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에 의한 피해가 아주 심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현재 시민단체 ‘나와우리’가 우리나라가 저지른 일을 진실로 미안해하며 작으나마 위로에 직접 나서 봉사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번 여름에 있을 ‘나와우리’의 베트남 평화캠프를 위하여 4월 6일부터 12일까지 중부지방인 꽝응아이(Quang Ngai)성과 꽝남(Quang Nam)성 그리고 푸엔(Phu Yen)성을 답사하는 여정에 함께 하였다.
꽝응아이성 작은 공항에 내리자 주변은 온통 하얀 나비가 너풀거렸다. 마치 이 마을이 아주 평화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꽝응아이성 외교부 산하 우정연합회와 행정부 산하 인민위원회 관련 공무원과 회합 |
▲ 맨 오른쪽이 이규봉 대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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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한 후, 빈선현 띤선싸 학살 당시 생존자 네 분을 빈선현 인민위원회에서 만나 선물과 피해자 지원금을 전달하며 위로하였다. ‘나와우리’는 운영자금도 넉넉지 않음에도 현재 7명의 생존자에게 매달 15달러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만난 분은 모두 키가 작고 아주 순박한 얼굴을 한 60~70대 노인이다. 오른쪽 다리가 없어 목발에 의지하고 있는 한 할머니를 보니 마치 내가 그렇게 만든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몸이 불편함에도 그 할머니가 말도 가장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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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등 성격이 매우 활발하신 것 같았다. 그 할머니의 이름은 팜 티 프엉(59·Cu Pham Thi Phurong)으로 혼자 살고 있으며 작년에 파편 제거 수술을 받아 그나마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이라 한다. 작은 가게를 하고 있는 할머니는 하루에 3만 동(한화 2,500원) 정도 번다고 한다. |
학교 운동장에 엎드리게 한 뒤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
꽝응아이성에서만 현재까지 모두 18건의 양민학살 사건이 공식 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700여 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선띤현 띤선사 지엔니엔촌에서는 1966년 11월 13일(음력 10월 2일) 츤산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여단 3대대 소속 1개 중대가 지엔니엔촌으로 내려와 수색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한국군들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주민 112명을 지엔니엔 사당으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고 한다. |
▲ 꽝응아이성 피해자와 함께 한 ‘나와우리’의 권현우와 통역을 담당한 베트남 ‘굿윌’의 응언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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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띤현 띤선사 푹빈촌에서는 1966년 10월 9일(음력 9월 27일) 릉동막사에 있던 청룡 3대대 소속 1개 소대가 마을로 밀고 들어와 집집마다 땅굴을 뒤져 주민들을 체포하여 푹빈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가 주민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뒤 수류탄과 기관총을 쏘아 모두 8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꽝남성 디엔반(Dien Ban)현 투이보(Thuy Bo촌) 마을로 갔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위령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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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보오 1967년 – 야만적인 미국 군대가 우리의 사랑하는 어르신, 소녀, 어린이 145명을 학살했다. 이를 대대로 마음 깊이 기억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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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한국군이 저지른 일이지만 남조선 군대를 미국 군대와 동일시하여 미국 군대라고 위령비에 적어 놓았다고 한다. |
꽝남성에서는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엄청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의 해맑고 밝은 모습은 나를 매우 부끄럽게 했다. 작년 여름에 ‘나와우리’는 이곳에서 평화캠프를 하면서 위령비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러자 유이쑤이엔(Duy Xuyen)현 유이응이아 마을에서도 힘을 모아 한국군 학살과 관련된 위령비를 마을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하여 세웠다. 마을에서 이곳에 이르는 길을 ‘한베 우정의 길’로 이름하여 작은 푯말을 세울 예정 |
▲투이보촌 마을 입구에 서있는 위령비 ⓒ이규봉 투이보촌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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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한다. |
우리 참전 군인들에게도 마음의 평화 깃들기를… |
▲2007년 평화캠프 마을(유이쑤이엔현 유이탄)에서 캠프 후 세운 푯말 ⓒ나와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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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른 마당 위에 말끔하게 서있는 위령비의 앞면에는 그 때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빨간 글씨로 희생된 사람의 명단과 사망 당시 나이가 함께 적혀있다. 놀랍게도 대부분 갓난아이들과 여자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우리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위령비에 향을 피워 올리며 우리 군인에 의해 죽은 모든 베트남인의 명복을 빌 뿐 아니라, 추악한 전쟁에 가담하여 양민을 학살하게 되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참전 군인들이 하루 속히 참회하여 마음에 평화가 오기를 빌었다.
꽝남성에서는 현재까지 약 30건에 달하는 양민 학살이 공식 확인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4천여 명의 양민이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디엔반현 투이보촌에서는 1967년 12월 21일 오전 10시경 2대의 헬기가 투이보촌으로 들어서는 길목인 고소이 지역에 청룡부대 1개 소대를 내려 한국군들이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고, 주민들은 총알을 피할 수 있는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겼다고 한다.
한국군들은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하여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라고 지시한 후 땅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쏘아 모두 145명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유이쑤이엔현 쑤엔터사에서는 1969년 2월 21일에 한국군 때문에 마을에서 도망갔던 34명의 주민들이 설 차례를 지내려 돌아 왔다가 학살당하였으며, 4월 6일에는 74명의 주민들이 모래둔덕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시체는 포탄구덩이에 던져졌다고 한다.
탕빈(Thang Binh)현 빈증사에서는 1969년 11월 11일 하루 동안 쩌록껀촌에서 75명의 양민을 다이너마이트와 크레모아를 사용하여 학살하였고 버우빈퉁촌과 버우빈하촌에서는 터씨의 땅굴에서 39명, 풍씨의 땅굴에서 15명을 학살하는 등 빈등사 5개 촌에서 모두 349명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
▲2008년 ‘나와우리’의 평화캠프 후 유이응이아 마을에서 건립한 위령비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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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푸엔성에 있는 ‘한-베 평화공원’을 방문했다. 한국군 참전으로 서로 총을 겨누며 피를 흘렸던 두 나라가 불행한 과거를 벗어나는 새 출발을 상징하는 이 공원은 <한겨레21>의 독자 성금으로 2003년 1월에 세워졌다. 공원 안에는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비와 평화를 염원하는 조형물 솟대 두 개가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나무 세 그루를 깎아 만든 이 ‘생명의 솟대’를 통하여 마치 하늘의 신령한 기운이 내려와 원혼들을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비단 희생당한 베트남 젊은이들만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숨져간 한국 젊은이들의 원혼들도 이 평화공원의 솟대에서 안식을 누렸으면 한다. 준공식에 맞춰 ‘한-베 어린이 문예대회’에서 입상한 작품이 한국과 베트남 화가들의 공동작업인 벽화로 만들어졌고, 그 앞에는 <한겨레21> 독자들의 성금운동을 기념하는 돌조각 작품인 ‘진실과 우정의 둥지’가 두 나라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민가와 떨어져 있고, 주변 공장지대에서 매연이 발생하고 가까운 바닷가의 바람에 공원에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관리를 자원봉사하여 맡고 있는 베트남 군인 출신의 관리인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
미군, 주로 한국군에 수색시켜… 민간인 희생자 9천명 정도로 파악 |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은 직접 원주민과 마주치는 마을에 대한 수색작전을 기피하여 마을 수색은 주로 한국군이 하였다고 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세뇌당한 우리 군인은 의사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낯선 환경과 전쟁이라는 긴장과 공포 상황에서 전과를 올리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수행하고 상층부의 묵인 아래 무차별 사살을 하여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정치국 전쟁범죄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부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자의 숫자를 5천명으로 추정하고 연구자들은 9천명 정도로 보고 있다.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족이나 그 피해자는 베트남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사로 활동하다 희생되면 그 유족은 열사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민간인인 경우 우리도 일본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에게 어떠한 보조금도 해줄 수 없었던 것처럼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어 삶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참전은 정치적 논리에 의하여 박정희가 제안하고 미국이 승인하여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군사독재는 더욱 강화되었고 사회 전체가 병영 사회화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 않고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참전 군인은 고엽제로 인해 후손까지 이르는 피해를 보았다.
우리는 참전한 대가로 돈을 벌고 그 결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도 일본에 의한 피해자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도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베트남에 대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포괄적인 협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중대한 국제법 위반행위다. 그러나 참전한 군인이 학살자는 아니다. 그들 역시 피해자일 뿐이다. 가해자는 그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와 그 종속국가이다.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이 생각난다. 지난 과거를 속죄하고 진정 베트남과 한국이 손에 손을 맞잡고 어깨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국과 베트남의 친선과 평화를 이루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