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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한층 더 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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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가 7월 22일 포럼 <진실과 정의>가 주최한 ‘노무현과 과거청산’이란 주제의 토론회에서 발표한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게재를 허락해 준 한홍구 교수께 감사드린다. – 엮은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시민사회는 과거청산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1. 머리말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우리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과거청산 작업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기간은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고, 수구세력과는 늘 요란하게 부딪혔다. 왜 노무현은 한국의 기득권 세력과 끊임없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대통령’ 노무현이 취한 정책의 상당 부분은 신자유주의적이었고, 한나라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한나라당에 대하여 대연정을 제안했던 것이고, 원래의 지지기반인 진보진영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수구세력과 대립했던 이유는 과거청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근본 문제는 과거청산이었는지 모른다.



이명박 수구정권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제 민주정부가 주도해 온 정부차원의 과거사진상규명 작업은 더 이상 추진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각종 과거사 위원회도 통폐합 위기에 시달리고 있거나, 임기가 만료된 위원들이 과거청산의 대의에 반하는 반민주적 인물들로 속속 교체되면서 위원회의 존립 의미 자체가 실종되어버린 것이다. 정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과거사위원회들이 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촛불에 데인 이명박 정권에게 수구세력의 결집은 존립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명박 정권은 수구세력의 지지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현대사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이명박 정권은 일년 내내 역사교과서 문제를 갖고 시비를 걸었고, 교육당국은 근현대사 특강이라는 미명 하에 거액의 강사료를 치러가며 근현대사에 대한 아무런 소양도 없는 무자격자들을 일선 학교에 내 보내어 반발을 샀다. 뉴라이트들은 또 이승만 정권 이래 아무런 탈 없이 잘 지켜오던 광복절을 뜬금없이 건국절로 바꾸겠다는 설익은 주장을 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기도 했다. 수구정권은 민주화 이후 20여 년 간 학계에서 축적해 온 상식을 무시하고, 민주정권 10년간의 과거사정리 작업을 통해 우리가 도달한 역사인식을 3-40년 전의 군사독재시절로 되돌리려 했다. 이들에게는 과거사 진상규명작업을 통해 밝혀진 현대사의 진실이 아니라 자기네 입맛에 맞게 지금 현재 자기네의 부와 권력과 지위를 정당화하는 왜곡된 현대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수구세력의 현대사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던 상황은 또 반대로 대중들이 현대사의 진실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시기이기도 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많은 대중들은 시민들의 엄청난 요구에도 불구하고 꿈쩍도 하지 않는 이명박 정권이 도대체 왜 저러나 고민하다가, 저들이 바로 친일파의 후예라서 그렇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2. 과거청산작업의 큰 흐름


한국은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만물상이다. 역사의 전개과정에서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이행기가 자주 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해방, 4ㆍ19, 10ㆍ26, 6월항쟁, 민주정권의 수립 등 여러 차례의 이행기에 한 시대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시대로 넘어갔다. 그러다보니 다른 나라와는 달리 과거청산의 과제가 겹겹이 쌓여있다. 과거청산의 과제가 중층적이라는 것은 그 해결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기득권세력은 그 많았던 이행기의 도전을 다 물리치고 살아남은 대단한 집단이다.


민주화운동의 분열 속에서 5공청산의 문제는 결국 김영삼 세력의 이탈로 3당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을 성사시키기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철저한 진상규명도, 과거에 대한 아픈 성찰도 사라져 버린 채 광주에서의 학살은 마치 소수의 신군부세력만이 자행한 것처럼 축소되었다. 광주에서의 시민들의 봉기가 간첩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떠들어댔던 공안세력도, 새 시대가 열렸다고, 새로운 영도자가 출현하였다고 떠들어댔던 언론인들도, 모두 면죄부를 받았다. 과거청산에 관한 한 김대중 정권의 한계도 명백했다. 김대중 정권은 장기간의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과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DJP연합이라는 특별한 조건, 즉 원조보수라고 불리는 김종필과 손잡지 않았다면 도저히 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의 보수세력이 쌓아 놓은 아성은 강고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의 국가폭력을 청산해야 한다는 피해자들의 절규와 시민사회의 요구에 대해 김대중 정권은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에 막대한 국고를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주요한 과제의 하나로 제시했다. DJP연합으로 간신히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구시대의 세력들에게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 그런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과거청산에서 대단히 중요한 전기가 되는 일이었고, 그런 사실은 청산대상이 되는 기득권세력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탄핵에서 살아난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에 복귀한 뒤 두 달 여 만에 맞은 2004년 8ㆍ15기념식에서 포괄적 과거청산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수구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이제 과거청산은 힘없는 시민단체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대통령과 의회에서 단독과반수를 차지한 집권 여당의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었다. 수구세력이 바짝 긴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적극적인 과거청산 의지에 대응하기 위해 출현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였다.


3. 노무현과 과거청산 


대통령후보 경선과정에서 행한 연설에서 노무현은 자신의 어머니가 늘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고 가르쳤다고 고백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껏 살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이제는 고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의 연설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노무현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 사회였다. 그 사회를 향하여 노무현은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외쳤다. 수백 년 동안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같은 가르침이 지속되어 어쩌면 우리들의 DNA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의 잠들어 있는 양심을 노무현은 흔들어 깨웠던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작업은 부끄러운 역사의 청산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은 과거청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노무현이 광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출생지가 어디냐와 상관없이 노무현은, 그리고 80년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광주의 자식이 되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광주의 아들딸이라 함은 광주 출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광주, 80년 5월의 광주 때문에 인생의 행로가 어긋나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아들딸들이었다. 노무현도 뒤늦게 광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부산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번 변호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 노무현은 진보진영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한나라당과 정책상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대연정을 하자는 갑작스러운 제안은 그에게 일말의 기대나마 갖고 있던 진보진영의 일부 세력조차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중에 노무현은 적의 진영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 진영에서 폭발해버렸다고 변명했지만, 진보진영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노무현이 진보진영과 함께 추구했던 수많은 아젠다 중에서 참여정부에서 일관되게 추진된 것은 과거사 문제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은 집권 초기부터 그 흔한 밀월기간도 없이 조중동 등 수구세력과 첨예하게 부딪혔다. 그런데 노무현이 수구세력과 첨예하게 부딪힌 문제는 경제정책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사 문제와 아울러 언론개혁이나 사립학교법 문제 등이 주된 쟁점이 된 것이다. 언론개혁의 문제도 사실 따지고 보면 친일문제나 군사독재에 대한 협력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과거사의 영역에 포괄될 수 있는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중에 국정원, 국방부, 경찰 등 권력기관의 과거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권력기관 내부에 자체적인 과거사위원회를 두는 방식으로 진행된 과거사정리작업을 통해 권력기관을 거듭나게 하려는 시도는 정권교체 이후 실패임이 판명되었다. 검찰은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과거청산작업에 착수하지 않았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철저한 검찰개혁에 성공하였다면 퇴임 후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검찰개혁의 실패는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4. 과거청산과 노무현의 죽음 

16대 국회에서 47석에 불과하던 열린우리당이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여당 단독과반수를 획득한 것이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부에 이어 입법부도 장악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중에서 사법을 제외한 양대 권력, 즉 선출되는 권력은 모두 수구세력으로부터 민주개혁진영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출되지 않는 권력으로서의 사법부(헌재 포함)가 갖는 위상이 각별히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경쟁적이다시피 국가보안법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처럼 한국사회를 달구어 온 첨예한 문제에 대하여 보수적인 결정과 판결을 내린 것은 바로 2004년 7월과 8월이었다.








한편 탄핵의 위기에서 기사회생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8ㆍ15 경축사를 통해 포괄적 과거청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이제 친일문제,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문제, 그리고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조작의혹이 제기되는 각종 인권침해 사건 등을 개별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포괄적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은 곧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시절부터 말해온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는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지배세력으로 군림해왔던 수구기득권 세력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청산작업이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것이라 우려하며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했다.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수구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인 2004년 10월이었다. 이어 10월 21일에는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지역균등발전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관습헌법’에 위배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내세워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니시어티브 아래 11월 1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출범한 것을 시발로 권력기관 내에 과거청산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사회는 이제 노무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민주개혁세력을 중심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려는 힘과 조중동 등 수구언론과 뉴라이트를 전면에 내세운 수구기득권세력 간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이 두 힘이 결정적으로 부딪힌 것은 2004년 말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국가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낼 때가 되었다는 표현으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처음으로 민주개혁세력에게 과반수를 허여했던 17대국회는 놀랍게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실패했다. 다 죽은 국가보안법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민주적인 개혁이 표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행정권력을 잃고 의회에서마저 소수파로 전락한 수구기득권 세력이 민주개혁진영의 총력 공격을 잘 막아내고 반전의 기회를 잡았음을 의미한다. 이후 한국사회는 한동안 민주개혁진영과 수구기득권세력 간에 서로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하는 아주 팽팽한 나쁜 균형에 빠져 있다가, 2006년 5월 지방자치선거에


서 민주개혁진영의 참패를 계기로 급속하게 수구진영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 경향은 2007년 말의 대통령 선거로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의 수구세력은 평범한 서민으로 돌아온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끝내 용납하지 않았다. 저들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을 가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거청산 작업에 대한 수구세력의 복수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의 수구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을, 그가 추구했던 과거청산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한국의 보수세력이 그만큼 허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실 과거청산은 진보와 보수를 따로 나눌 문제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을 수습하고 원한을 풀어주는 일에 어찌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것인가? 안기부 지하실에 끌려가 수십일 간 두들겨 맞고 간첩으로 둔갑한 무고한 시민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어찌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것인가? 과거청산의 과제를 외면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대시함


으로써 한국에는 합리적인 보수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지고, 천박한 수구세력만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가치를 보듬고 재창조하는 보수세력이 아니라 기득권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은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려는 노무현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왜 한국에서 보수를 표방하는 자들은 스스로 과거청산의 과제를 떠맡지 못했던 것일까? 이런 자들은 보이지 않고 과거청산 얘기만 나오면 길길이 날뛰고 운동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를 용병으로 고용한 수구세력이 합리적 보수세력을 교살하고, 노무현마저 죽인 것이다.


5. 노무현 정신의 재발견과 시민사회의 과제








이제 민주진영은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낸 상태에서 민주정권 시기 정부 주도의 과거청산의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다시 과거청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서 과거청산운동이 재가동되려면 민주주의 회복과 밀접한 연결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과거청산 작업은 일제 시대 관련 과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과제, 군사독재정권 시기의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각각 진행되어왔다. 이렇게 분산된 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거청산작업은 창립기념 토론회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선수들만의 과제가 아니다.


강풀의 만화 <26년>이나 영화 <화려한 휴가>가 증명했듯이 과거청산은 여전히 광범한 대중의 가슴을 움직일 수 있는 뜨거운 문제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역시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인 뜨거운 일이었다. 이제 과거청산운동은 새로운 방식으로 슬퍼하는 대중들이,


노무현을 그리워하는 대중들이 노무현을 죽음으로 이르게 한 자들을 미워하는 대중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방식의 운동을 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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