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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이 보낸 코 감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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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코무덤>편(2)


이윤옥 김영조


풍신수길이 보낸 코 감사장









▲ 왼쪽 코 영수증(23번)은 코 3,369개를, 오른쪽 코 영수증(10번)은 코 3,000개를 받았다고 분명히 적혀있다. ⓒ조중화 


400여 년 전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 땅에서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 중 ‘코 베기 명령’의 꼼짝없는 증거품이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베어진 코 영수증이다. 이렇게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선 현지에서 수집된 코는 7명의 관리가 소금에 절여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냈으며 이때 풍신수길은 소금에 절인 코를 손수 세어본 뒤 일일이 해당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수십 장의 코 영수증과 이에 대한 풍신수길의 감사장을 세상에 밝힌 사람은『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1996, 학민사』를 쓴 조중화 씨이다. 그는 오사카성 천수각에 보관된 코 영수증을 비롯하여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땅 곳곳을 누비며 그들만이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했다.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전쟁에 참가한 병사뿐만 아니라 부녀자들 목숨까지 앗아서 코를 베어 간 전대미문의 잔학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토의 코무덤을 지시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바로 풍신수길이란 자다. 그는 코만 베라 한 것이 아니다.


“굶주린 일본군이 식량징발을 위해 산에 숨어 있던 조선인과 전투를 했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눈과 코가 많이 나왔다. (御兵具衆 山より被?候 目鼻も?多い候。海南)”


위 글을 통해 심한 경우에는 눈알도 서슴없이 도려낸 것이 풍신수길 부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1597년 10월3일 시마쓰 부대에 종군한 승려 멘고렌 조보(面高連長坊)의 『高麗日記』에 실린 글이다. 산으로 숨은 조선인들을 뒤쫓아 가서 숨겨놓은 식량을 내어놓으라며 선량한 사람을 죽여 코를 베고 눈알을 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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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진 코 영수증’ 들어보셨나요?(민족문제연구소, 09.08.27)


임진왜란의 명분이 명나라 정복이라면 정유재란은 한반도 남쪽 절반의 점령이 목적이었다고 일본역사는 말하고 있는데 이미 오랜 기간 전쟁에 따른 손실과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대부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건너왔지만 좀처럼 작전 개시를 안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보내고 있자 풍신수길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597년 6월 15일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코베기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라도에 가서 식량을 확보하고 여러 성을 공격한 뒤 충청도로 들어가서 사병 1명당 한 되(升)씩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그러나 사병 한 1명당 한 되는 1명당 3개로 바뀌어 풍신수길에게 전해졌는데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코베기는 1597년 8월15일부터 약 한 달간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병사 1명당 3개의 코를 할당하여 모두 214,752개의 코가 풍신수길에게 보내져서 한 곳에 묻혀 ‘코무덤’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며 귀를 베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평생을 ‘코무덤’ 연구에 바친 조중화 씨는 그의 책에서 당당히 밝혔다.


알려진 풍신수길의 잔학성 : 소실 죽이기


소금에 절여 보내온 코를 일일이 손수 세었다는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어디가 끝일까? 잠시 풍신수길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보자.


그는 6살 때 하급무사 출신 아버지가 죽자 재혼해버린 어머니 손에 의해 2년 뒤 광명사란 절에 맡겨진다. 그러나 거친 성격으로 이 절에서 쫓겨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결국 15살에 가출하여 거리를 배회하다 당시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 권력에의 야욕을 불태운다.


풍신수길은 24살에 결혼하여 부인 외에 소실이 200명이 넘었다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일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한 이후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일본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몸소 경험한 인물로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풍신수길은 교토와 사카이에 사는 반반한 처녀와 과부를 끌어와 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중 한 여자가 몸이 안 좋아 친정으로 보내졌다. 여자는 자유의 몸이 된 줄 알고 병이 낫자 중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를 안 풍신수길은 질투와 복수심으로 이 여자와 남편을 잡아다가 허리 아래를 흙 속에 생매장하여 굶어 죽게 한 뒤 목을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와 유모, 친정어머니를 불태워 죽였다고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28세의 조카 히데츠구를 죽이는 장면은 가히 망나니가 날뛰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53살에 얻은 아들이 3살 만에 죽자 풍신수길은 다시는 자식이 안 태어날 것으로 단정하고 성급히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풍신수길이 57살 되던 해 소실 몸에서 다시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조카를 처단하고자 맘을 먹고 역모죄를 씌워 일단 고야산(高野山)으로 출가시켜버리지만 이내 쫓아가 심복들과 함께 할복자살을 하도록 한다. 이어 조카며느리를 포함한 히데츠구 일가와 처첩 4남1녀의 자식 등 39명을 히데츠구의 목이 내걸린 무덤 앞으로 끌고 가 5시간 동안 처참하게 죽인 뒤 ‘반역을 꾀한 짐승무덤 <惡逆畜生塚>’ 이라는 팻말을 내거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다.


이러한 인간 말종 풍신수길을 두고 교토 코 무덤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가증스러운 글이 쓰여 있다.


“1597년 풍신수길은 일본 장병들에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중략) 장병들이 적의 목을 베어야 하나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냈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 지었다.” 1597년 9월 28일 (조중화씨 번역)


이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相國寺) 주지 쇼다이에 의해 쓰인 것으로 풍신수길을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스런 장군”으로 왜곡한다. 또 조선인의 코를 벤 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라 일본군 병사의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벌어진 양 거짓표현하고 있다. 풍신수길의 잔인성으로 볼 때 코무덤이야말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장군의 “영원한 힘의 과시”로 남기고 싶은 그릇된 욕망일 뿐 결코 비명횡사한 조선인을 안타까이 여기고 한 짓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풍신수길 심복조차도 ‘코무덤’이라 밝힌 무덤이 어째서 ‘귀무덤’이 되었는가?


명백히 상국사 주지 쇼다이는 ‘코무덤’이라 밝혀두었는데 이것이 ‘귀무덤’이 된 것은 풍신수길 뒤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의 23살 브레인 하야시 라산의 지적에 의해서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 있다.


1898년 풍신수길 사망 300주년을 맞아 일본 명치정부가 대대적으로 ‘풍공(豊公) 300년제’를 거행하면서 무덤 앞에 세운 사람 키보다 큰 비문은 풍화작용으로 글자가 거의 알아보기 어렵지만 비문의 중요부분을 조중화씨 번역으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정유재란 때 한반도 전선에서 일본군이 연전연승하여 처 죽인 조선군의 코를 베어 전공의 표시로 바친 것이 수만 개가 되었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조선 전사자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그 코를 호코지(方廣寺) 앞에 큰 무덤을 만들어 묻고 ‘코무덤’이라 이름 지어 비석을 세웠다. 그 뒤 잘못 불러 ‘귀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때 비문만 보더라도 명백히 ‘코무덤’이라고 했으며 ‘귀무덤’이란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일본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이것을 최근 한국인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귀무덤’이라 확대 재생산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로 하루속히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일본 지명, 인명은 가급적 현지음으로 적었으나, 독자들에게 익숙하고 자주 언급되는 지명과 인명에 한해서는 한자음으로 적었다. (예) 도요토미 히데요시 → 풍신수길, 가토 기요마사 → 가등청정, 고니시 유키나가 → 소서행장


<3편 ‘통한의 코무덤 그 못다 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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