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친일인명사전은 식민지의식 벗어나는 좋은 안내자”

601













『야생초 편지』 저자 황대권의 편지 전문


민족문제연구소


문화를생각하는사람들(대표 이종수 www.artizen.or.kr) 주관으로 9월 2일 오후 7시 30분부터 약 1시간 30동안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친일인명사전발간기념콘서트 <기억과 기록 그리고 미래>가 열렸다. 이날 콘서트에서는『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 씨가 편지 형식의 축사를 통해 “친일인명사전이 나오기까지 더디고 힘든 과정이 있었지만 이제라도 발간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반일하자고 만든 것이 아닌 우리민족의 부끄러운 의식인 식민지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이 책이 좋은 안내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씨는 서울대 농업교육학과를 졸업 후, 뉴욕 뉴스쿨 포 소셜 리서치(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전두환 정권이조작한 이른 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2개월을 복역한 후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대표적인 양심수 중 한명이었다. 현재는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으로 생명평화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전남 영광에서 생태공동체를 꾸려가고 있다.

아래는 황대권 씨가 콘서트 당일 낭독한 자작 편지 전문이다.









선아,

오늘 이 자리는 부끄러운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는 자리란다. 오늘 나는 네게, 나는 어떻게 이 부끄러운 역사를 살아왔는가를 말해주려 이 자리에 섰단다.


나는 1955년생이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꼭 7년 뒤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고 아무런 의문 없이 이 나라의 공교육 12년과 대학교육 4년을 다 마치었으니 그야말로 순수한 대한민국 청년으로 자란 셈이지. 그런 내게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군대 다녀오고 대학도 졸업한 내 나이 28세 때였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갔단다. 당시에 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미국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 도서관에서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을 마주친다. 기다란 군도를 허리에 찬 한 일본군 장교의 사진인데 그 밑에 “박정희-오까모토 중위시절”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얼굴을 보니 영락없는 박정희 얼굴이었다. 18년 동안 오로지 그 얼굴을 보며 학교생활을 했는데 헷갈릴 리가 없었다.



불세출의 영웅이자 조국근대화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장교였다니!


순간 나의 머릿속은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분한 마음에 무작정 길거리로 뛰쳐나가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저들이 내게 ‘친일교육’을 제대로 시켰다면 그렇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들은 바보같이 자신들의 과거가 부정당할 게 빤한데도 정작 학교에서는 ‘반일교육’을 했을까? 식민지권력에 빌붙어 권력을 장악했지만 민중의 압도적인 민족정서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정서로는 ‘반일’을, 지식으로는 ‘친일’을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적어도 일본에 관한 이중인격자가 된 셈이지.


선아, 나는 지금 네게, “안팎으로 일관된 반일교육을 시켰어야 옳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잘못된 교육으로 인한 가치관의 혼돈을 말하고 싶은 게다.


“독립운동은 옳은데 그런 삶을 택하면 현실적으로 가난하고 무시당한다.”
“당대의 권력에 아부하면서 살면 당장에 욕은 먹겠지만 적어도 자손과 가문은 영광을 누린다.”


이런 시기의 천박한 가치관을 갖도록 만든 대한민국의 건설자들이 못내 아쉬운 거다.


올해 광복 60년 만에 드디어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었다. 참으로 더디고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게 한 없이 자랑스럽다.


나는 이 책의 목적이 ‘반일’을 하자는 게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가 겪은 역사를 정확히 바라보고 그 부끄러운 역사가 내게 심어준 ‘부끄러운 의식’(식민지 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 이 책이 좋은 안내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 편지를 쓴다.


선아, 공부 열심히 하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희망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가자꾸나.


2009년 9월 2일 친일인명사전발간 기념공연에 부쳐
                   성미산 마을극장에서 바우 올림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