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옥·김영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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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塚·四百年』에서 코무덤을 다룬 한일 학자들의 핵심 주제는, ‘(1) 귀무덤이냐? / 코무덤이냐? (2) 묻힌 코(귀)는 몇 개냐?’가 중심이었다. 그리고 토론회에서 연구자들의 주장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다음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1) 풍신수길이 ‘코베기 명령’을 내린 것은 정유재란 때이며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은 이유는 후세에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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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학술토론회 이전에도 메이지 시대에 이미 도쿄대학 호시노 박사가 그의 논문에서 『교토 코무덤은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이다』라고 명확히 밝혔으며 나카오 히로시 씨 역시 코무덤의 결정적인 1급 사료인 깃가와가 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 문서(鍋島家文書)에서 코영수증은 있어도 귀영수증은 없다며 코무덤임을 단정하고 있다. 또 결정적인 증거는 교토시에서 세운 코무덤 안내판이다. | ||||||||||||||||||
교토시 코무덤 안내판에는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 라잔이 “너무 잔학하다”라며 완곡한 표현인 귀무덤으로 하자 해서 이때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그 유래를 분명히 적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 라잔의 주장 이전에는 코무덤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야시 라잔의 말을 따라 이후 ‘耳塚’ 곧 귀무덤으로 써놓았던 것을 교토시가 코무덤의 왜곡을 인정한 것인지 2009년 7월 19일 현재는 귀무덤(코무덤)으로 바꿔놓았다. 곧 ‘코무덤’을 추가해 넣은 것이다. 물론 풍신수길의 코베기는 그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배운 솜씨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남녀 2,000명을 죽이고 신체에서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신장기(信長記)』에 있다고 나카오 씨는 말하고 있다. 풍신수길이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 있을 때 이미 코베기를 잘하여 우수한 장수로 뽑힌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기독교 박해 때인 1596년엔 26명의 성인(聖人) 순교 때에도 코를 베게 한 사실이 있다. 또 토론회에서 금병동 씨는『본산풍전전수안정부자전공각서(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라는 책의 내용을 들어 풍신수길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라고 했다면서 금수보다 못한 일본군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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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묻었으면 코무덤이요, 귀를 묻었으면 귀무덤이다. 이 문제는 잔학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위의 정리된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풍신수길의 의도적 코베기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부르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베어진 코는 조선에서 일본에 어떻게 운반되었을까? 베어진 코는 일단 배편으로 나고야까지 보내졌고 나고야에서는 오사카까지 다시 배편으로 그리고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길가에는 개선장군처럼 큰 수레에 싣고 지나가는 조선인의 베어진 코를 보려고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다고『조선왜구사(朝鮮倭寇史)』를 들어 금병동 씨는 전하고 있다. | ||||||||||||||||||
자, 그러면 또 하나의 쟁점인 베어진 코의 수에 대한 견해를 보자.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 나카오 히로시 교수는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코무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코베기 기간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로 보고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조중화 씨의 “코베기가 정유재란 때의 만행”이라는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토시 코무덤에 묻혀진 코 숫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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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코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는 베어진 코가 한군데 모아져 정확히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예로 일본 곳곳에 귀무덤 또는 코무덤이라는 것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풍신수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교토시 코무덤 외의 것으로서 조선출병 왜군들이 귀국 후 자신의 전공(戰功)을 과시하려고 빼돌려 묻거나 거짓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조선에서 베어진 코 숫자가 서로 다르게 주장되고 있는 것은 후세에 기록하는 사람들의 부풀리기 내지는 착오 등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군감끼리 한반도 전선 허위보고를 놓고 벌어진 고소고발사건(우스기시사, 臼杵市史, 참조)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 수와 코 영수증의 허위문서 작성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정확한 코 숫자는 학자들의 더 정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 ||||||||||||||||||
어쩌면 이 부분은 오래도록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어진 코 숫자를 근거 없이 부풀려서는 안 되며 또한 숫자도 중요하지만 코무덤에 묻힌 것이 과연 귀냐 코냐의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무덤에 대한 코냐 귀냐의 논쟁은 막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신수길이 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따져본다면 우리는 하야시 라잔의 주장을 따라서 귀무덤이란 완화된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일본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용인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통한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끝난 지 400년이 넘었다. 그리고 1997년엔 400주년 추도식과 학술토론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인 코무덤에 대해서는 아직도 왜곡투성이인 채 한 술 더 떠 우리 스스로 역사 기록에도 없는 ‘귀무덤:이총,미미즈카’라는 용어를 만들어 계속 쓰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하랴! 【학술토론회에서 나온 코무덤 관련 자료들】 1. 吉野甚五左衛門覺書 2. 征韓錄 3. 淸正行狀 4. 朝鮮の役 5. 朝鮮物語 6. 木村又?覺書 7. 淸正朝鮮記 8. 淸正高麗陣覺書 9. 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 10. 朝鮮征伐記 11. 武家事記 12. 和漢三才圖會 13. 征韓記? 14. 島津家高麗軍秘錄 15. 中外經緯傳 16. 高山公實錄 17. 鍋島直茂譜 18. ?田家譜 19. 元親記 20. 吉川家文書 21. 加藤家?淸正公行狀 22. 面高連長坊高麗日記 23. 朝鮮倭寇史 24. 耳塚修營供養碑文 25. 日用集 26. 梵舜日記 27. 山城名勝志 28. 山州名蹟志 29. 本朝通鑑 30. 朝鮮軍記大全 31. 左傳 32. 二六新報 33. 齊藤實文書 34. 近世日本國民史 35. 文祿慶長の役 36. 信長記 37. 義演准后日記 38. 鼻請取狀 39. 豊臣秀吉譜 40. 看羊錄 41. 朝鮮日日記 42. 使行錄 43. 見聞別錄 44. 扶桑錄 45. 御沙汰書 46. 西遊草 * 바로잡음: <제2편>에서 교토 코무덤에 묻힌 코의 수는 214,752개라고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에서 조중화 씨는 밝혔다고 필자가 썼으나 (144쪽 인용) 이 기록은 묻힌 코가 아니고 1598년 1월경 조선인과 명나라 사람의 베어진 코였음을 바로잡는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2년 후에 《바로잡은 임진왜란사, 삶과 꿈, 1998》에서 조중화 씨는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코는 3,276개(4쪽)로 정정하였다. 그 이유는 정유재란 후 귀국한 일본 군감 사이에 코영수증을 포함한 서류 위변조 고소고발 사건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베어진 코 숫자의 부풀리기를 지적하고 그 후 연구 결과 이러한 숫자가 나왔다는 것을 밝혔다. <제4부> 통한의 코무덤 마지막 편이 기다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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