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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떻게 친일했는가, 기록 분명히 남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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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황홀한 글감옥』에서 친일파 청산에 대한 생각 피력


































소설가 조정래 선생이 최근 자전 에세이『황홀한 글감옥』을 새로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의 이 책 내용 중엔 임종국 선생에 대한 추억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선생의 생각이 담겨져 있어 그 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그리고 이 책을 출판한 <시사IN북>에서 보내온 보도자료도 함께 싣는다. – 엮은이


 조정래·소설가


◎『한강』에는 친일파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대 친일파는 아직도 부유한 삶을 누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늦었지만 현재라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규정·제주교대 


▶ 해방과 더불어 친일파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한 것은 민족적 불행이고 국가적 재난입니다. 왜냐하면 불의한 자들을 공명정대하게 처벌하지 못함으로써 민족 정기가 훼손되었고 민족 정통성이 무너졌으며, 국가의 존엄성이 서지 않았을뿐더러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입니다.


  ‘바른 일 한다는 놈 병신. 어떻게든 출세하는 놈 최고.’


 이런 부정적인 가치관과 부당한 기회주의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넘치는 것은 다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데서 비롯했습니다. 참 슬픈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방 직후 크고 작은 정치세력은 제각기 건국 강령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데 성격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인데도 똑같았을까요. ‘해방의 새 세상’이라는 것이 결정적 힌트이니 여러분 한 번 맞혀보십시오.


 예, 별로 쉽지 않으니 제가 말씀드리지요.

 첫째, 친일파 척결.
 둘째,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첫 번째는 민족 정기의 문제였고, 두 번째는 생존 조건의 문제였습니다.


이 공통점은 정치세력의 탁월한 정치 능력과 투철한 사명감에서 나온 것일까요?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전 민족 성원의 요구가 그랬고, 시대정신이 그랬고, 그 두 가지를 앞세우지 않으면 정권을 잡을 기본 자격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 두 가지가 다 남쪽에서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그 과정은 이미『태백산맥』에 자세히 쓴 그대로입니다).


 저는 1977년 1년 동안《소설문예》라는 포켓용 소형 문예 월간지를 발간한 일이 있습니다. 문학 독자의 확대를 꾀한 것이었지요. 그때 임종국 선생이 우리 잡지에 연재를 했습니다. 임 선생은 그때 모든 사회진출이 차단되어 천안에서 밥을 굶듯이 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해방 이후 모든 지식인이 친일파에 대한 연구나 언급을 철저하게 기피하고 있을 때 오직 혼자서 펜을 들었고,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보복은 가혹하고 잔혹했습니다. 친일파가 모든 분야에서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분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도록 철저하게 사회 진출을 차단당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그분의 비참한 모습은 친일파에게 도전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 케이스기도 했습니다. 그 공포에 질렸음인지 친일파를 문제 삼는 지식인은 그 후로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아사지경에 빠진 고난 속에서도 친일파 연구를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범위를 문학에서 벗어나 전 친일파로 넓혀서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예나 지금이나 문예지 경영은 어려워 저는 1년 만에 경영권을 넘겨야 했습니다. 제가 특별히 부탁을 했지만 새 경영자는 임 선생 글을 연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저는 다시《한국문학》의 주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저는 다시금 임종국 선생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했고, 임 선생님은 제 사무실에 오셨는데, 저는 얼마나 죄송했는지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제 사무실은 엘리베이터 없이 5층이었고, 아들의 부축을 받고 올라오는데도 임 선생은 숨이 가빠 한동안 말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병이 중하면 올라오지 말고 아래에서 전화를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임종국 선생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하시는 친일파 연구를 매달 연재하십시다. 그리고 원고가 모이는 대로 단행본으로 내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마워요, 조형. 내가 몸이 좀 나아지는 대로 원고를 정리할게요.”


 임 선생은 숨을 헐떡거리며 그 천진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폐의 병은 끝내 그분을 저세상으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임 선생의 친일파 연구에 힘을 보태고자 했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달래고, 임 선생이 하신 일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밝히고 싶어『한강』에 임종국 선생을 등장 시켰던 것입니다.


 기필코 남아야 할 기록


 임종국 선생의 연구 업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민족문제연구소’입니다. 그곳에서는 ‘친일인명사전(가칭)’ 발간을 벌써 8년째 준비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한 법 하나 만들지 못하고 식민지 시대보다 더 긴 64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국내의 친일파도 척결하지 못한 상태로 일본에게 사죄를 하라니 일본이 우리를 뭘로 보겠습니까. 그들이 진심 어린 사죄를 하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며, 그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씌운 치욕이고 모멸입니다.


 우리는 친일파를 법으로 처벌할 시기를 놓쳤습니다. 당사자 99퍼센트 이상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문제를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럴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누가’ ‘어떻게’ 친일을 했는가를, 그 객관적 기록이나마 분명하게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민족사가 요구하는 바이며, 민족사 앞에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책무이며, 나라를 찾으려고 싸우다 돌아가신 순국 영령께 그나마 더 죄짓지 않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번성과 평안 속에는 나라를 찾으려다 고통과 통분 속에 숨져간 분들의 피가 젖어들고 영혼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은 방대한 분량이라 국민 모금으로 발간하게 될 것입니다. 모금이 시작되면 그때 여러분, 여러분의 형편대로 모금에 적극 참여해주십시오. 하나뿐인 목숨을 내놓으신 분이 무수합니다. 우리는 용돈을 조금 내는 것입니다.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1930년대, 추수 때 80퍼센트까지 빼앗겨야 했던 소작마저 데인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만주로,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 넓은 땅이 비어 있어 허겁지겁 논을 일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추수가 되자 말 탄 무장대가 나타났습니다. 그건 마적 떼가 아니라 땅 주인이었습니다.


 우리 동포는 또 수확의 절반을 빼앗기는 소작인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농토를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군전·학전·생전. 독립군을 돕는 논, 자식을 가르치는 논, 먹고사는 논.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황홀한 글감옥>
– 조정래 작가 생활 사십 년 자전 에세이


지은이 : 조정래
펴낸곳 : 시사IN북


– 시사IN북은 시사주간지 <시사IN>에서 만든 출판 브랜드입니다.<거꾸로, 희망이다>는 시사IN북에서 펴내는 첫 번째 단행본입니다.


발행일 : 2009년 9월30일
판형/쪽수 : 신국판/428쪽
값 12,000원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1970년 <현대문학> 6월호에 ‘누명’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올해로 작가 생활 40년째를 맞이했다. 작가 조정래가 현대사 3부작 대하소설(<태백산맥><아리랑><한강>)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자전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을 펴냈다.


자전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씌어졌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 250여 명에게서 ‘평소 조정래 선생에게 궁금했던 질문’ 500여 개를 받았고, 이들 질문 가운데 84개 질문을 추려 그에 답하는 형식이다.


작가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로 문학 인생 40년이 되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꽤 많은 강연을 해왔다. 그때마다 독자들이 아쉬워했던 것이 질문 시간 부족이었다. 어떤 독자들은 편지를 해오지만 거기에 일일이 답장을 쓰기도 어려웠다. 세 편에 걸친 긴 소설에 대한 독자의 궁금증은 많고, 그것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하는 것은 늘 미안한 짐으로 남았다. 또 내 마음에 남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질문 하나가 있었다. ‘왜 자전 소설은 쓰지 않느냐’. 몇몇 출판사에서 그런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풀 수 있는 책을 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새 작품을 쓸 일이 바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글을 쓰기에 적당한 시기가 아닌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중략)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에게 5백여 가지의 질문을 받았다. 겹치는 것을 빼고,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을 간추린 것이 이 책에 수록된 84가지다. 그 84가지 질문은 대충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문학론·작품론·인생론. 그 응답들을 형식을 달리한 나의 자전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현대사 3부작에 얽힌 비화와 제작 노트
40년 글쓰기 체험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문학론과 창작실기론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크게 문학론·작품론·인생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책의 초반은 40년 글쓰기 체험을 바탕으로 문학론과 창작실기론을 풀어놓았다.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수많은 인물을 창조해낸 비결까지 그의 소설을 읽고 문학을 꿈꾸는 청년이라면 한번쯤 떠올렸을 질문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


조정래 선생의 현대사 3부작을 읽은 독자라면 그가 밝힌 현대사 3부작에 얽힌 비화와 제작 노트를 흥미롭게 읽을 듯하다. 야뇨증이 심하던 어린 시절, 엄격한 아버지와의 관계, ‘소년 빨치산’ 박현채 선생의 격려와 도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두 번의 도움’, 소설가 최일남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밝힌’ 박태준 회장의 기부 사실 등은 작가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비화이다. 또 그동안 현대사 3부작에서 독자들이 스쳐 지나갔던 ‘인간 조정래’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작가는 “<태백산맥>의 독자들이 이번 자전 에세이를 읽으면 보물찾기나 퍼즐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태백산맥>에는 작가 조정래의 분신이 들어 있는데, 지금까지 그걸 찾아낸 독자가 몇 안 된다”라고 말했다.   


작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베끼게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태백산맥>을 모두 필사하고 나서도 하지 않았던 말이다. 그의 말은 이렇다. “내가 굳이 <태백산맥>을 베끼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는지 직접 체험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태백산맥> 베끼기를 통해 아들과 며느리가 인생이란 스스로 한 발, 한 발 걸어야 하는 천리길이란 것을 깨우쳐주고 싶었다. 인생이란 지치지 않는 줄기찬 노력이 피워내는 꽃이라는 것을 체득시키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성실하게 노력하라’ ‘꾸준하게 노력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태백산맥> 베끼기를 택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베끼기를 다 끝냈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매일 지치지 않고 미련하게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나타내는지 절절히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작가 조정래는 “만일 지금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이번 글이 내 인생을 정리한 유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내 아들에게도 못한 얘기를 이번에 다 썼다”라고 말했다. 40년 동안 글을 써온 큰 작가의 ‘인생론’이다.


간략한 책 내용 소개·요약


(자세한 내용은 괄호 안에 표시된 쪽부터 찾으시면 됩니다. 요약문은 편집자가 정리한 것으로 본문의 서간체 문체와는 다르니 인용을 하실 경우에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승려였던 아버지, 그리고 문학을 접하게 된 사연(74쪽)


아버지는 순천 선암사 승려였고, 시조시인이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개편되기 15년쯤 전까지 조종현(趙宗玄)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시조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열여섯 살에 고향 고흥 왕주를 떠나 선암사로 출가했다. 신식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불교계에서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서 젊은 승려들에게 신식 교육을 시킬 때였다.


스물넷에 법사가 된 아버지는 전국의 젊은 승려 3백여 명이 일제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만당(卍黨)에 가입했다. 총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었고, 아버지는 만당의 재무위원을 맡았다.


아버지는 선암사에서 결혼을 한 최초의 승려가 되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그 당시 최대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던 불교를 장악해야만 식민통치가 용이해진다는 판단 아래 종교 황국화 정책을 추진했고, 그 방법의 하나로 젊은 승려들을 결혼시켜 일본식의 ‘대처승’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제의 은혜로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이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 도리다. 그래서 <아리랑>을 쓴 것이다.


아버지는 해방이 되고 절 앞에 세 개의 현수막을 걸었다.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해야 한다.’ ‘절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승려들은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주지의 생각은 부주지인 아버지의 생각과 달랐다.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주지의 모함으로 아버지는 경찰서에 잡혀갔다. 세 차례나 죽음 직전까지 끌려갔다가 아슬아슬하게 살아났다. 아버지를 아끼는 한 유지의 도움으로 순천을 떠나 논산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서당 훈장을 했고, 생계를 위해 5일장이 서는 두 곳 장터로 포목 장사를 하러 다녔다. 장터길을 나설 때는 나를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20리 황토 들길을 걸으며 늘 시조를 읊었다. 시조 공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953년 봄에 벌교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벌교상업고등학교에 국어 선생이 된 것이다. 그 학교 교장이 송광사 출신으로 아버지처럼 신식 공부를 한 덕에 환속을 해 교장이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개인 문집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지은 동시와 동요을 본 아버지가 물었다. “이것이 니가 지은 것들이냐? 이리 낱장에 쓰면 되겄냐. 이리 와 앉어라.” 아버지는 반짇고리를 찾아와 실을 꼬고 휴지로 쓰는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 이면지를 접어 옛날 책 매는 방식으로 공책을 만들었다. 글짓기를 모아두는 공책을 ‘문집’이라고 한다는 말까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시험지의 색깔이 거무스름하고 질이 나빠 걸핏하면 찢어져 사람들이 ‘똥지’라고 하대하는 ‘똥지 문집’에다 동요, 동시를 열심히 지었다. 그렇게 모인 문집이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대여섯 권이 되었다.   


– <태백산맥><아리랑><한강>의 인물 1천2백여 명. 유일하게 겹친 이름 ‘허진’(131쪽)


소설 속 인물 가운데는 실재 인물이 모델이 된 경우가 몇 있다. <태백산맥>의 김범우가 제 외삼촌(박순동. 그분은 김범우와 달리 순천 군정청에 근무했음)이고, 법일 스님이 제 아버지고, 소년 빨치산 조원제가 정치경제학자 박현채 선생이다. 그리고 <한강>의 퇴직기자들은 한겨레신문 전 사장인 권근술씨와 그분의 동료들이 간접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각 인물의 생김과 언행과 역할에 꼭 어울리도록 이름을 지었다. 독자 인상에 명확하게 밝힌 중요 주인공의 성(姓)까지도 전부 달리했다. 어느 텔레비전 프로에서 나는 “예, 겹치는 이름이 없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출판사를 통해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선생님께서 약간의 착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아리랑> 끝 부분에 나오는 허진이란 이름이 <한강>에도 나옵니다.’ <아리랑>의 허진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단역 중의 단역이었다. 수첩에 주인공의 이름을 전부 적어가며 열심히 읽었을 그 여성 독자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 책에 사인을 해서 사례를 하고 싶었으나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 화가가 되고 싶었던 작가 조정래(142쪽)


그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심심풀이로 미술책에 있는 인물 데생을 스케치북에 그렸다. 그 그림을 미술 선생이 보게 되었고,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했다. “물감 대줄 돈 없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미술반 행은 좌절되었다. 나는 화가가 못 되면 김용환 선생 같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노트에 칸을 쳐가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나이까지도 그림 그리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손자들에게 50가지 색 크레용이나 24가지 색연필 같은 걸 살 때는 내 것도 꼭 산다. 외국에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예쁜 색연필을 보아 넘기지 못하고 또 산다. 취재수첩에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를 보면 당시 상황과 느낌과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수십 권의 취재수첩에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한풀이를 실컷 하는 것이다.(취재 수첩 사진 있음)


소설을 쓰기 어려워질 때 나는 새 인생을 시작하듯 그림을 그릴 예정이다. 그때는 물감을 아끼지 않고, 사재기한 것을 맘껏 써가며 고흐 같은, 루오 같은 질감으로 그림을 그릴 것이다.


– 아내 김초혜 시인에게 바친 링컨 초상화(148쪽)


대학생 김초혜는 이미 문단에서 등단한 시인이었다. 또 ‘동국문학회’의 최초의 여학생 회장이었다. 문학회 합평회 준비를 하면서 나는 그녀의 만년필을 빌렸고, 빵을 사야만 돌려주겠다는 작전을 세워 마침내 말문을 트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땡전 한 닢도 없었다. 어떤 선물을 할까 고심하다가 번뜩 영감이 떠올랐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에이브러햄 링컨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마다 조금씩 가는 선들을 수백 번 그렸다. 나비넥타이를 그리는 것으로 링컨 그림을 다 완성했을 때 겨울방학은 끝나가고 있었다. 정성스레 표구해 김초혜 시인에게 바쳤다.


2003년 김제에 <아리랑> 문학관이 세워지자 아내는 그동안 고이 간직해왔던 링컨 초상화를 내놓았다. 내가 그린 자화상과 함께 <아리랑> 문학관 제2전시실에 나란히 걸려 있다.(링컨 초상화와 자화상 사진 있음)


– ‘몸짱 사진’에 얽힌 사연(168쪽)


고등학교 시절 못내 글을 쓰고 싶었지만 문예반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중학생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중·고등학교를 합한 문예반의 지도교사였던 것이다.


해가 바뀌고 학교에서 이상한 조처를 취했다. 특활반을 활성화할 테니 활동하고 싶은 새 부서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역도를 해오던 친구의 유혹에 업혀 나는 역도반을 만들고 나섰다. 역도반은 뜻밖에도 대인기였다. 하루 한 시간의 역도 운동 1년에 내 몸은 내가 보고도 놀랄 만큼 변했다. 가슴둘레가 1미터가 넘고, 턱걸이를 60번을 넘게 할 수 있는 괴력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 체력단련 덕을 20여 년이 지나 톡톡히 보게 되었다. 대하소설 세 편을 연달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니까.(역기를 들고 있는 고등학생 조정래 사진 있음)


– 승려가 될 뻔했던 작가 조정래(174쪽)


“너 부처님 앞으로 가거라.”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아버지가 느닷없이 내놓은 말이었다. 불교 분위기가 가득한 우리 집안에서 그 말이 ‘승려가 돼라’는 뜻인 것 정도는 초등학생인 막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가슴에서는 ‘아니 아버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원망이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기절할 뻔했다. 그건 내 이름이 적힌 승적(僧籍)이었다. 그때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서너 달 전에 아버지가 호를 지어준 일이었다. 인천(天)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하늘을 벗해 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호가 바로 승적에 법명으로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벌써 몇 달 전부터 나를 출가시킬 작정을 하고 호를 그렇게 지어주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것이다. 승적에는 ‘조계사 승적 168호’라는 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저는, 저는 글을…. 문학을 해야 합니다.” 나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그야 출가해서도 못할 게 없다. 만해 선생을 봐라. 그분께서는 종교도 문학도 둘 다 크게 이루셨다.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든 다 이룰 수 있다.” 그 정도의 반발은 다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아버지는 이렇듯 가볍게 받아넘기고 말았다. 문학을 못하고 중이 되어야 하다니! 머릿속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때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만해 선생께서는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더는 말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승부는 그렇게 끝났다.


– 1983년 6월, 전두환 시절에 <태백산맥>을 연재할 때의 일(213쪽)


1983년 6월에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시절이었다. 나는 사회주의자나 빨치산들이 악마나 흡혈귀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말하려 하고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근본 잘못은 물론 북쪽과 인민군에 있지만 전쟁의 와중에서 우리 국군과 경찰, 그리고 미군도 잘못한 것이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려 하고 있었다. 그런 계획을 세워놓고 2회분을 잡지에 보내놓고, 3회분을 쓰고 있는데 불안감은 점점 커갔다. 더 미루지 말고 내가 무엇을 쓸 것인지 아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마친 것은 새벽 1시쯤이었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여보, 놀라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내가 계획하고 있는 대로 써나가게 되면 분명 위해가 닥칠 거야. 그때 애 데리고 견뎌낼 수 있겠어?” 아내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작가가 쓰고 싶은 걸 못 쓰면 작가가 아니잖아요. 마음먹은 대로 써요.”


– 소년 전사 조원제의 모델, 정치경제학자 박현채 선생(229쪽)


박현채 선생은 광주서중학교 선배였다. <태백산맥> 후반부를 이루는 빨치산 이야기들은 선생의 천재적인 기억력에 의한 증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빨치산 출산에 대한 취재가 어려운 상황에서 빨치산 평대원도 아니고 문화부 중대장을 지낸 간부를 만났으니 그것을 길을 가다가 다이아몬드 덩어리에 걸려 넘어진 격이었고, 길에서 주은 복권이 1등 당첨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정래가 누구여? 나랑 잠 만났으면 쓰겄는디.” 이 말을 앞세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나 박현채라고 허요. 근데, 소설 참 맛나게 잘 썼습디다 이. 아조 재미지게 읽었는디, 앞으로 빨치산 야그가 본격적으로 나와야 쓸 것 같등마, 워째, 나가 그짝얼 쪼깨 아는 것이 있응께로 들어볼 맴이 있소?” 나는 솟구치는 반가움을 그대로 드러내며 대답했다. “예, 예, 그런 분을 찾고 있었던 참입니다.” 천군만마라는 말, 박현채 선생이 제 앞에 출현한 것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이다.


수시로 박 선생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때마다 선생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반갑게 말상대를 해주고는 했다. 형사의 눈을 피해 이 다방 저 다방 구석 자리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 멀고 험한 지리산의 현장 취재도 싫은 기색 한 번 하지 않고, 흔쾌하게 배낭을 지고 나서고는 했다. 박 선생은 지리산 준령을 넘고 넘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세석평전의 드넓은 분지에 가을 달빛이 넘치고 있었다. 소주잔에 담긴 달빛까지 마시며 선생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여기 세석평전에서 경남도당이 몰살을 당해부렀어야. 밑에서는 포위한 군경이 밀고 올라오고, 우에서는 비행기가 네이팜탄을 퍼부서대는디 워쩔 수가 있었겠냐. 시체가 늘핀허니 여그럴 다 덮어부렀제. 여그서 지천으로 피는 철쭉은 그냥 철쭉이 아닌 것이여.” 깊은 한숨으로 선생의 목은 메이고, 두 볼에는 굵은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 과음하신 선생은 발을 헛디뎌 한 길 넘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이고 말았다. 그 사고로 선생은 목을 다쳤고, 침을 맞으며 서너 달 치료를 해야 했다. 저는 죄송스러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박현채 선생과 작가가 지리산에서 찍은 사진 있음. 책에는 이 내용 말고도 더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밤마다 걸려오는 협박 전화. 그리고 이어령 문화부 장관의 도움(259쪽).


<태백산맥> 3부가 나온 1988년 하반기부터 살벌한 공갈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새벽 두세 시에 걸려오는 전화였다. 전화는 1997년 무렵까지 1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여보, 전화번호를 바꾸면 어떻겠어요.” 견디다 못한 아내의 말이었다. “아니야. 그 사람들 곧 알아내고 말아. 그리고 우리가 무서워하고, 쫒기고 있다는 인상을 줘선 안 돼. 그 자들은 더욱 심하게 나올 테니까.”


1989년 10월에 단행본이 나오는 것으로 <태백산맥>은 완성되었다. 나는 바로 <아리랑> 취재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중국 취재는 가로막혔다. 대한민국 안기부에서 못가게 하는 것이었다. <아리랑> 쓰기를 포기해야 하나 어쩌나 하는 암담한 마음으로 있는데, 문화부에서 전화가 왔다. 문화부 초대 장관인 이어령 선생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어령 선생의 ‘장관 보증’으로 중국에 갈 수 있었다. 이어령 선생의 도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992년 대검찰청에서 내사를 끝내고 <태백산맥>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소설 <태백산맥>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미 350만 부 이상 팔린 책을 법으로 문제 삼는 것은 과히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기로 했다.’ 검찰의 그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문화부 장관 이어령 선생이었다. 검찰은 내사를 진행하면서 해당부서인 문화부장관에게 의견서 제출을 요청한 것이었다. 장관은 평론가 김상일 선생에게 ‘<태백산맥>은 이적 표현의 위험이 있는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해 씌어진 <신판 홍길동전>이다’고 쓰라고 방향을 정해준 것이다. 그 의견서 제출 사실을 10여 년이 지나 김상일 선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은 참으로 큰 어른이었다.


1994년 <아리랑> 쓰기에 골몰해 있었다. 그때 8개의 반공단체가 나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빨갱이로 고발했다. 그동안 기가 좀 수그러들었던 협박 전화는 새 기운을 얻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1994년 4월에 고발당해서 2005년 5월에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만 11년을 잡아먹은 그 사건은 사법사상 가장 길게 끈 고발 사건이 되었다(경찰·검찰 조사에 대한 내용은 이 꼭지에 매우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아들과 며느리에게 <태백산맥>을 필사하게 한 까닭(297쪽)


많은 독자가 왜 내가 아들만이 아니라 며느리한테까지 <태백산맥>을 베끼게 했는지 궁금해한다. 내가 한 일의 어려움을 터득케 하려고 그랬을까? 우리 역사를 철저하게 이해시키려고 그랬을까? 세상살이의 복잡다단함을 미리 체험케 하려고 그랬을까?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아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것인지 어쩐지 아내도 그걸 다 베끼게 하는 건 너무 심하지 않으냐는 느낌을 얼핏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내가 <아리랑>하고 <한강>까지 베끼게 하지 않은 것을 고마워해야 해.”


내가 굳이 <태백산맥>을 베끼게 한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꾸준히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이루는지 직접 체험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태백산맥> 베끼기를 통해 아들과 며느리가 인생이란 스스로 한 발, 한 발 걸어야 하는 천리길이란 것을 깨우쳐주고 싶었다. 인생이란 지치지 않는 줄기찬 노력이 피워내는 꽃이라는 것을 체득시키고 싶었다. 젊은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성실하게 노력하라’‘꾸준하게 노력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태백산맥> 베끼기를 택했다. 아들과 며느리가 베끼기를 다 끝냈을 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매일 매일 지치지 않고 미련하게 하는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나타내는지 절절히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 박태준을 존경하는 이유(370쪽)


왜 내가 <한강>에서 포항제철과 그 건설자 박태준을 쓰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까지 집필하게 되었는지를 밝힙니다. “우리 레닌 동지가 꿈꾸고 추구한 이상향을 저는 여기 포철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모스크바 대학 총장 빅토르 사도브니치는 포항제철을 둘러보며 이렇게 감탄했다. 그리고 그가 한국을 떠난 4개월 뒤에 소련이라는 거대한 나라는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듯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모스크바 대학 총장이면 소련 최고의 지성이며, 소련공산당 최고급 당원이다. 그런 사람이 자기네의 주신 격이며 최고 최대 영웅인 레닌의 이름을 내세워 포철의 성취를 ‘이상향’이라고 묘사했다. 모스크바 대학 총장은 포철의 공장 시설을 보고 그렇게 놀란 것일까? “제철소의 최신 설비와, 공장답지 않게 깨끗한 관리 상태도 놀랍지만, 그보다도 사원 주택단지와 학교들이 제철소와 가깝게 있으면서도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정말 놀랐습니다. 공장단지와 주거단지가 이렇게 쾌적하고 청결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스크바 대학 총장이 밝힌 이유다.


미혼의 독신자 숙소는 아파트였다. 도서실, 휴게실, 스포츠 센터가 있는 것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호텔 객실 같은 방이 몇 개 있었다. 그건 면회 온 부모님을 위한 숙소였다. 한국에 이런 회사가 있다니! 그런 시설이 박태준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 섬세한 배려는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려는 진정한 마음이 없고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참사람 박태준을 발견했고, 그 순간 존경의 염을 갖게 되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문학관을 가진 내가 진정한 사람을 발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박태준은 광양제철을 완공한 다음 명예회장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앉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스톡옵션은커녕 퇴직금도 받지 않고 맨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집 한 채 있던 것을 팔아 ‘아름다운 재단’에 10억원을 기부하고도 세상이 모르게 했다. 지금 내가 최초로 공개한다. 그분이 노여워해도 할 수 없다.


지은이 약력


1943년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단편집 <어떤 전설><20년을 비가 내리는 땅><황토><한, 그 그늘의 자리> 중편집 <유형의 땅> 장편소설 <대장경><불놀이><인간 연습><사람의 탈> 대하소설 <태백산맥><아리랑><한강> 산문집 <누구나 홀로 선 나무> 청소년을 위한 위인전 <신채호><안중근><한용운><김구><박태준><세종대왕><이순신> 등을 출간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성옥문화상, 동국문학상, 단재문학상, 노신문학상, 광주문화예술상, 동리문학상, 만해대상 등을 수상했다. <시사IN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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