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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반민특위 위원장 전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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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위원장 전상서
[ 김상덕 선생께 아들 김정륙씨가 올리는 편지 ]






金 尙자 德자.


그리움에 사무쳐 감히 아버님 존함을 불러봅니다.








▲ 김상덕 선생(1891~1956)


일본과 중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로 일본 유학시절 동경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1920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닦는데 헌신했고, 광복 후 귀국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특위위원장으로 활동했으나 6.25전쟁때 납북됐다.


아버님은 그 험난했던 독립운동의 삶을 꿋꿋이 버텨 냈습니다. 반민특위 위원장 시절과 동족상잔의 전쟁은 또한 어떠했습니까. 아버님과 아버님의 가족이 겪은 비애를 소자는 알기에 더욱 그리워집니다.


6.25때 아버지는 신생 대한민국 건설에 꼭 필요한 수많은 인사들과 함께 납북 당하셨습니다.


1950년 6월 27일.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인공기가 높이 올라 펄럭이고 있었는데도 도하신문에는 의정부 탈환이라는 기사를 대서특필 했고, 국방장관, 육참총장의 허풍에 맞추어 일국의 대통령이 육성방송으로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나 이승만을 믿으라’는 소리를 아버지와 소자가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한강다리를 끊어 퇴로를 막고 대통령은 멀리 대전에 내려가 놓고서는 말입니다.


그 발표를 믿은 사람들이 서울에 갇혀 납북된 것이 진실인데, 대국민 사기극을 벌인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납북인사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지난 2006년10월1일. 저희가 북쪽 묘역 참배를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의 집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묘역을 디딘 것도 잠시, 다시 이별의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저희 남매는 참으로 서글펐습니다. 아버지! 아들 능이와 딸 길성이 따르는 술잔을 그 때 받으셨습니까?


아버지! 중경에서 터 잡고 살던 손가화원 시절, 굶주리고 배고팠던 기억마저 지금은 그립습니다.


중경의 임시정부에서 집으로 돌아오시면, 저의 손을 잡고서 한통 가득 빨래를 들고 양자 강가로 가셨지요. 아버지가 빨래하는 사이, 철부지 저는 드넓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그러다 싫증이 나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요.








▲ 중국 중경시의 손가화원 터


김정륙 씨가 아버지 김상덕 선생과 유년시절 머물렀던 손가화원. 손가화원은 조선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모두 헐리고 터만 남아있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빨래를 마치고 힘겨워 허리를 쭉 펴고 있자면, 바구니를 지고 백사장을 오가며 잔 술 파는 행상들의 한 잔 술을 간절해 하던 아버지의 눈길을 기억합니다. 한 잔 술마저 망설이는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은 지금도 저의 심사를 저리게 합니다. 큰 맘 먹고 병아리 오줌 보다 조금 많은 한 잔 술을 사게 되면 목을 젖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려 했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술안주 마른두부는 값만 묻고 말았었죠.


아버지의 손자 진영에게 일러 제상(祭床)에 반드시 두부전을 차려 올리게 한 것은 그 때 기억 때문입니다.


아버지, 막내 영이가 죽자 충격을 받고 저희 남매를 고아원에 맡기셨지요. 고아원 시절, 아침에 모기장을 개지 못해 저는 늘 벌칙을 받고 먼 산을 쳐다보며 아버지를, 손가화원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사변 후 아버지를 잃고 떠돌던 유랑길이었습니다.


한 때 외갓집에 잠시 머물렀지만 고향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의기소침한 성장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납북자 가족에게 씌워진 연좌제라는 올가미 탓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기를 펼 수가 없었습니다.


뒤늦게 쇠락한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에도 인연이 닿아 일가를 이룬 소자는 아들 진영(鎭玲), 딸 경은(京垠)을 얻어 아버지의 대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며느리 이름은 이건자(李健子), 참으로 현모양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러했듯 며느리 또한 고생병으로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며느리를 보셨습니까? 많이 아프다 떠난 며느리를 부디 잘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버지, 평양 룡성구 묘역에 세워진 아버지의 비문에 1956.4.28(음 3.17) 하늘나라에 오르신 것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혀 알 길이 없으니 이날 함께 제상을 차리기로 정했습니다.








▲ 평양 룡성구에 있는 김상덕 선생의 묘 앞에서 술을 올리는 김정륙 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인 김정륙 씨는 2006년 9월 30일부터 10월 4일 까지 진행된 ‘재북 애국지사 후손 성묘단 평양방문’에 참가해 아버지 묘역을 찾았다. 


아버지, 지금 세상은 불의가 정의를 구축하는 난세입니다.


아버지가 쉽게 이해되시게 말하자면 반민특위 때의 노덕술, 최운하, 최난수 등에 견줄 자들이 나타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의 불의에 나라가 다치고 아버지가 다치고 있으니 좌시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갈라놓고 있는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임시정부는 우리나라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사실이 없고, 미군정이 대한민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으니 건국의 모태는 미군정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망명정부의 실효적 지배 운운하는 저들의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이들의 논리대로 라면 1945년 이전에 실효적 지배를 한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주체적 역사라는 어이없는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친일매국한 노덕술 등과 견주어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이들의 불의는 응징 받아 마땅하다고 봅니다.


아버지, 이런 고약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이는 해방 후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해 생겨난 혼돈인 만큼 하늘나라에 품의하시어 이를 바로잡아 반민특위 위원장의 못 다한 몫에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소자는 이 탁한 진세가 싫어 조용히 전원으로 들어왔습니다. 동두천 산자락 밑에 터를 잡고, 진달래 동산도 만들어 힘겨웠던 세월을 달랠 안식처를 지을 생각입니다. 작지만 아늑한 정원이 가꾸어질 때쯤이면 저는 마음 놓고 아버지, 어머니를 뵈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때 까지 부디 평화의 나날이 있으시길 기원 드립니다.


소자 능 올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김정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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