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길의 잔학상을 고스란히 말해주는 교토 코무덤 | ||||||||||||||||||
김영조·이윤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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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2세 배동록 씨(67살)가 안내한 시모노세키 뚱굴동네 등 곳곳에 짙은 그림자로 남아 있는 차별과 가난의 세월을 살아 온 재일조선인의 삶의 터전을 둘러본 뒤 답사단은 오사카행 밤배에 올랐다. 시모노세키 건너편 신모지항에서 오사카행 밤배는 12시간 항해 끝에 아침 9시가 다되어서야 오사카항에 우리를 내려줬다. 이곳에는 재일동포 4세 김정태 씨와 3세 손보영 씨가 답사단의 오사카, 교토 안내를 위해 항구터미널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일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문화가 꽃피던 시절을 들라 하면 교토시절이라 할 수 있다. 서기 794년부터 400년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라 부르는데 백성은 편안했으며 사원과 신사들은 융성하였다. 겐지모노가타리 등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후지와라 등의 귀족들이 호화로운 생활이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교토는 발길 닿는 곳마다 청수사, 광륭사, 금각사 같은 오래된 절들이 즐비할뿐더러 후시미이나리대사, 기타노텐만궁, 야사카신사 등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 본사들도 곳곳에 산재하여 관광명소 1위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도시의 한쪽 교토박물관 뒤편에 코무덤은 있다. 임진·정유재란 시에 풍신수길이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곳이다. 그 옆에 일본의 영웅 풍신수길 사당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도 있다. 이 신사가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바로 코앞에 잡초가 무성한 ‘귀무덤공원(미미즈카)이 있고 이 작은 공원 끝에 있는 코무덤을 찾은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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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치워라 돌 치워라 / 봉분 위 돌 치워라 / 먼 고향 남원 땅 엄니 곁에 나 가리라 / 왜놈 칼 맞고 코 잘려 그 길로 왜놈 땅 끌려왔네 / 돌이 애비야 돌이 애비야! / 황천길 아들 찾아 헤매셨을 엄니 / 여보 여보 돌이 아빠 울부짖으며 / 지아비 시체 찾아 헤맸을 아내 / 아부지 아부지 어디계셔요 / 눈물 흘리며 엎어지고 기어가며 애비 찾았을 피붙이 / 돌 치워라 돌 치워라 / 봉분 위 돌 치워라 / 좁은 무덤 박차고 훨훨 날아 내 고향 남원 땅으로 / 나 돌아가리라” (고야 -코무덤-) 답사단원들은 귀무덤(미미즈카 공원)공원을 지나 돌덩이가 봉분 위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코무덤 앞에섰다. 싸구려 표지판에는 “조성 당시에는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 초기 유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라는 궁색한 안내문이 일본어와한글로 적혀 있었다. “굶주린 일본군이 식량징발을 위해 산에 숨어 있던 조선인과 전투를 했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눈과 코가 많이 나왔다“(御兵具衆 山より被參候 目鼻も數多い候。海南)” 이것은 1597년 10월3일 시마쓰부대에 종군한 승려 멘고렌조보(面高連長坊)의 ≪고려일기(高麗日記)≫에 실린 글이다. 또 코무덤 연구가인 금병동씨는《본산풍전전수안정부자전공각서(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라는 책을 들어 풍신수길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고 밝힌 바 있다. 여러 문헌이 입증하듯 이곳은 임진·정유재란 때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곳이련만 무슨 까닭인지 교토시에서는 귀무덤(미미즈카)이라는 안내판을 지금도 세워두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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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코를 베었다’는 실질적인 자료 외에 이곳이 ‘귀무덤(미미즈카)’이 아님을 더 명백히 밝혀주는 단서가 있는데 그것이 이른바 코 영수증이다. 풍신수길은 정유재란 때 조선인 코를 베어 오사카로 보내라고 명령한 뒤 조선땅에서 소금에 절여 보내온 코를 일일이 세어 코 영수증을 발행했다. 당시 참전했던 장수 집안에서 쏟아져 나온 코 영수증은 있어도 귀 영수증은 없다. 따라서 이 무덤을 두고 귀무덤이라 부르는 것은 바르지 않다. 잔인성으로 봐도 ‘코베기’가 잔인하며 그 잔인성을 희석시키려고 ‘귀무덤’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일본의 음모를 우리가 따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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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평화를 여는 기행 답사단은 굳게 철문이 닫힌 코무덤 앞 계단에 서서 비명횡사하여 이국땅에서 구천을 떠돌고 있을 조상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어서 고국 땅으로 가고 싶어 하는 영령들의 슬픈 마음을 하늘도 알았는지 맑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더니 굵은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바람에 우리는 서둘러 풍국신사 앞에 세워둔 전세버스에 올라탔다. 굵은 빗줄기가 유리창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마치 400여 년 전의 조상들이 자신들도 함께 태우고 가 달라며 조르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버스 안에서 답사단원들은 코무덤 속에 묻혀 있는 코의 숫자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그 답을 1997년도에 있었던 “코무덤 조성 400주년 학술토론회”에서 찾아보자. 이날 토론회에 나온 베어진 코 수를 말하기 전에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임을 증명하는 학자들의 견해를 먼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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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무덤이 아니고 명백한 코무덤 임을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코의 숫자를 보도록 하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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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의 숫자는 당시 주고받았던 ‘코 영수증’에 근거한 것으로 도쿄대학 호시노 박사의 5만여 개가 어느 정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그 어떤 주장도 정확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왜냐하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코 영수증의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일부 가짜 영수증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가짜가 나돈 까닭은 ‘코 영수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조상의 용맹성을 과시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빚어낸 웃지 못 할 영웅심 때문으로 보이며 이를 입증할 사건기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정유재란에 출전했던 일본 군감끼리 한반도 전선 허위보고를 놓고 벌어진 우스기시(臼杵市)의 소송사건이다. 법원에서 이 두 가문이 제시한 코 영수증이 가짜였음이 확인되는 바람에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교토시 코 무덤에 묻힌 코 숫자는 정확한 숫자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어쩌면 이 부분은 오래도록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문제는 코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살상하고 잔인하게 코를 베어다 묻은 일에 대한 반성이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없다는 사실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코무덤’을 만든 풍신수길의 잔인함을 감추기 위해 ‘귀무덤’ 이라 부르자 한 것을 순진하게 그대로 받아 불러주는 한국인들이 있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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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단원들은 똑똑히 보았다. 교토 코무덤 앞에 세워진 교토시의 설명판에 “귀무덤(코무덤)”이라고 쓰인 것을 말이다. 일본 안에서 그간 경과를 보면 “코무덤 ⇒ 귀무덤 ⇒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바뀌어왔다. 하지만, 한국엔 아직 코무덤이라 부르는 사람이 적다. 여기서 한국의 역사 왜곡 현장을 가보도록 하자.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는 한자로 “耳塚”이라 쓴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죽은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의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 시선을 끌지 못할 작은 위령비 “耳塚”이 있고 그 앞 표지판에는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풍국신사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군청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기념비란 예부터 기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짧은 문장 안에 함축성 있게 표현해야 하는 것으로 한국에 세우는 기념비라면 당연히 우리의 시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이 표지판의 왜곡부분을 보자. 1. 풍신수길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랐다. 사천문화원의 이러한 잘못된 표지판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교육자료’는커녕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 표지판은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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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장으로 활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어찌 실감할 것이던가! 왜곡된 “귀무덤” 비석에 대해 사천시문화원 원장에게 전화로 질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은뒤에도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며 사천문화원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전화를 끊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금 교토 풍신수길 사당 앞에 만든 코무덤 봉분 위에는 무지막지한 돌비석이 눌려져 있다. 그 속에서 조선의 외로운 영혼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분명히 귀가 아닌 코를 잘리고도 귀로 둔갑하여 한 번더 억울한 원혼이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흙 일부를 모셔와 안치하고 비를 세운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살풀이춤을 춘들 통한의 원혼이 모두 용서하고 편안히 잠들 수는 없을 것이다. 왜곡된 코무덤을 밝히려고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발로 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의 지은이 고 조중화 씨 부인 하선자 씨는 아직도 “이총(귀무덤)”인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눈물을 글썽인다. 남편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정유재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겨레는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 왜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에 전쟁준비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은 죄.그 죄 탓에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임진왜란 통한의 현장 코무덤! 과거의 굴절 되고 왜곡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바로잡지 않는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다. 교토 코무덤의 흙 한 줌을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400년 아니라 4천 년이 흘렀더라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 이후 우리 입에서 더는 ‘귀무덤’이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코무덤’이다. 8월의 길고 무더운 하루를 식히는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 한낮의 따가운 태양을 가려줄 아무런 그늘막도 없이 누워 잠들어 있는 외로운 조상의 코무덤을 돌아 나오며 우리는 두 가지를 결의했다. 하나는 앞으로는 더는 귀무덤이라 부르지 말 것과 다른 하나는 코무덤의 외로운 영혼을 모두 고국으로 모셔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디더라도 이날 답사단원들은 그날까지 함께 하자는 굳은 맹세를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 ||||||||||||||||||
<제6편> 오사카 츠루하시의 조선인들은 어떻게 살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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