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조·이윤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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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높다란 “百濟門(백제문)” 아래는 코리아타운이란 영문자가 선명하고 양옆에는 한글 간판이 이 제법 눈에 띈다. 어딘지 우리네 고향 시장을 닮은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금세 한국 땅에 서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남대문 시장의 먹자골목과도 흡사한 이 시장거리에는 먹음직한 부침개를 비롯한 순대와 족발은 물론이고 김치와 깍두기도 살 수 있고 된장, 고추장도 살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색동저고리는 물론이요, 지금 서울에서 유행하는 가수의 노래 테이프도 실시간으로 살 수 있다. 말 그대로 코리아타운, 한국동네다. 오사카 츠루하시는 우리말로 ‘학다리’ 곧 ‘학교(鶴橋)’이다. 답사단이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에 도착한 것은 8월 10일 화요일로 답사 넷째 날이었다. 오사카에는 땅이름에 다리를 뜻하는 “하시” 또는 “바시”가 들어가는 곳이 많다. 다리 “교(橋)”자가 들어가는 지명으로는 닛폰바시(日本橋), 요도야바시(淀屋橋), 신사이바시(心齊橋), 나가호리바시(長堀橋), 교바시(京橋), 텐마바시(天滿橋), 미도리바시(綠橋)등이 있으며 우리가 찾아간 한인타운 역시 학다리 곧 “츠루하시(鶴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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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에서 재일동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 이들이 이곳에 살게 된 것을 대략 3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제주지방행정사, 제주발전연구원, 2009≫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의 일본행을 크게 3시기로 보고 있는데 1시기 1910년~1924년, 2시기 1925년~1937년, 3시기는 태평양전쟁을 대비해 전시체제가 시작된 1938년~1945년 해방까지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주도민의 경우지만 이러한 사실은 조선 전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천황과 조선인과 총독부, 김일면, 일본도쿄 田畑書店, 1984≫에는 위에서 언급한 3시기에 걸친 조선인의 일본행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일제강점 초기인 1913년 1월, 일제는 조선총독부칙령 39호로 ‘역둔토특별처분령(驛屯土特別處分令)’이라는 해괴한 법률을 만드는데, 이는 일본인의 조선 이주를 돕는 “조선수탈법령”이었다. 이 법률 이전에 이미 ‘조선이민자모집공고’를 내어 조선에 진출할 일본인들을 모집했지만 위 법률로 ‘조선인의 토지를 총독부가 맘대로 처분할 수 있다.’라는 근거를 마련하는 교활한 정책을 편 것이다. 총독부의 보호 아래 조선으로 건너가는 일본인은 무일푼인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정착자금과 1인당 2정보(6,000평)의 땅을 공짜로 주고 또 값싼 이자로 얼마든지 땅을 구입하여 지주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총독부의 이러한 술책에 고무되어 ‘조선에 건너가서 한 몫 보려는 일본인’들이 대거 건너오게 되는데 1912년에 이미 5차 모집이 있었고 1918년에 이르면 일본인 지주는 급격히 증가하여 자작농민 9,774호(38,000명), 대지주 590호 규모로 늘어나게 된다. 이들은 주로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의 곡창지대를 휩쓸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정작 토지 주인이었던 조선인들은 남으로 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어버렸고 부산항에는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의 값싼 노동시장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명의 일본인이 조선에 건너오면 십여 명의 조선인이 고향을 등져야 하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3시기의 경우에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은 전시 비상체제로 돌입하게 되자 조선을 완전통제 하에 두었고, 특히 1938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젊은 장정들을 군인, 군속 등 전쟁터로 내몰았으며 노동력 있는 남자와 여자는 노동자로 써먹으려 강제연행을 감행했다. 이러한 곡절로 일본 땅에 건너간 재일조선인들 중 많은 이가 일본이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남게 되었는데 오사카의 경우 츠루하시 시장을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나간 것이 츠루하시 재일조선인의 역사다. 지금은 어느새 3~4세들이 나름대로 기반을 잡아 살고 있다. 패전 후 소규모 암시장으로 시작하여 오늘날과 같은 번듯한 시장을 형성하게 된 츠루하시의 상점가 점포수는 1,000여 곳으로 한국 관련 상품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츠루하시 상인들도 “츠루하시는 겨레의 고향”으로 여기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어머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다. 답사단의 츠루하시 시장을 안내해준 사람은 재일동포 2세 문우평 씨였는데 답사단이 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섭씨 35도의 불볕더위가 내리쬐고 있었다. 그가 시장 골목을 요리조리 미끄러져 나가듯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천오백 년 전 백제인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당시 왕인박사가 건너 와서 불렀다는 <나니와즈의 노래(難波津の歌)>비 앞에서 그는 고대로부터 오사카가 한일관계의 바탕이 된 곳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츠루하시의 유래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예전에 이 일대는 학 곧 두루미들이 많이 놀던 곳이며 이곳에 일본 최초로 세운 것이 학다리 곧 츠루하시(鶴橋)라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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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와즈(難波津, なにわつ, 나니와츠)란 고대 오사카만에 있었던 항만시설로 현재 오사카 중앙부분인 츠루하시 근처다. 이 자리엔 2009년 10월 31일에 세워진 ‘나니와즈의 노래’비가 있다. ‘나니와즈의 노래’란 1,000여 수의 노래(시)가 수록된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 서기 905년)에 실린 것으로 왕인박사가 지은 시이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에만 해도 왕인박사의 이 노래를 모르면 문학인이나 귀족 측에 끼지 못할 정도로 유명한 노래로 전해지고 있다. 노래를 한번 감상하자. なにはづに さくやこの花 ふゆごもり いまははるべと さくやこのはな 백제사람 왕인박사는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나오는 인물인데 ≪고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百濟國 若有賢人者貢上 故 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卽論語十卷 千字文一卷 幷十一卷付是人卽貢進此和邇吉師者、文首等祖) ≪古事記≫ 번역하면, “백제에 뛰어난 학자가 있었는데 응신천황 때 와니기시(和邇吉師, 왕인을 뜻함)가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등 모두 11권을 일본에 전해주어 비로소 한자와 유교가 전해졌다.”라고 되어 있다. 재일동포 문우평 씨는 고대의 자랑스러운 역사현장을 안내하면서 츠루하시를 포함한 오사카의 재일조선인은 이러한 훌륭한 조상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일제강점기라는 한때의 치욕스러운 역사가 있긴 하지만 우리 겨레는 분명히 일본 고대사를 살찌운 사람들이다. 그것은 일본의 숱한 역사서들이 증명하고 있으며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음)에 불교를 전해주면서 지어준 나라 법륭사(607), 교토 광륭사(603), 오사카 사천왕사(593)를 위시한 불교유적들이 잘 말해주고 있다. 문우평 씨는 우리에게 주로 츠루하시 시장 중심의 고대사 현장을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천오백여 년 전의 고대사 현장을 한 발짝만 벗어나면 21세기 츠루하시 뒷골목과 만난다. 상가 번영회에서 만든 커다란 아치형의 백제문과 여기저기 내 걸린 펼침막의 화려함을 뒤로한 뒷골목은 국제도시답지 않은 열악한 주거 환경이 눈에 띈다. 다닥다닥 붙은 대여섯 평도 안 되는 2층짜리 단독주택들은 한국 같았으면 벌써 재개발에 들어가 고층 빌딩이 들어섰음직도 한데 여전히 박제된 영화 세트장처럼 골목마다 낡은 집들이 즐비하다. 비좁고 낡은 뒷골목을 걸으며 혹시 재일조선인 거리라고 시 당국에서 버려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교토 우지시의 상하수도도 갖춰주지 않는 우토르 마을이 그렇고 시모노세키의 똥굴동네를 비롯한 조선인 집단 마을에서 느끼던 푸대접과 같은 인상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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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평 씨는 짧은 시간 안에 답사단을 위해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싶어서인지 몹시 바쁜 발걸음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한 동포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서니 우리 민속품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다. 벽에는 제사상 차림과 돌상차림 사진이 있고, 가마솥, 놋그릇, 항아리, 장군, 밥상, 소쿠리 등 반가운 한국 민속품이 보인다. 이들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자 하는 의지가 가마솥에서 풍겨오는 구수한 밥 내음처럼 느껴졌다. 좁은 시장 골목에는 한글간판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한 김치 가게 앞을 지나다 보니 맛깔스런 반찬들이 마치 한국의 반찬가게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다양한 먹거리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한국산 라면도 인기가 있는 듯 즐비했다. 곳곳에 부침개 붙이는 냄새도 솔솔 풍겨오는 이곳은 “퇴근시간 전철을 타고 츠루하시 역 근처를 지나다 전철 문이 열리면 불고기 냄새가 풍겨와 침이 넘어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전할 만큼 한국음식이 없는 게 없다. 한국 불고기는 일본말로 “야키니쿠(燒肉, 구운 고기)”라고 불리며 야키니쿠 하면 츠루하시 재일동포를 떠올린다는 일본사람이 있을 만큼 츠루하시의 불고기는 일본인 사이에서도 유명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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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시장은 한복가게들도 많은데 그만큼 재일동포들이 한복을 사랑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여기 한복들은 한국에서 흔히 보는 것들보다는 화려해 보여 언뜻 보면 북한 쪽 옷을 닮은 느낌이 든다. 츠루하시엔 주말이면 일본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한국김치를 사가거나 음식을 먹고 한국에서 유행하는 노래테이프를 사는 등 왁자지껄하다고 한다. 한류의 현장을 실감케 한다. 중심거리인 미유키도오리상점가(御幸通商店街)엔 태극무늬와 함께 “백제문”이라 쓰인 열린 대문이 있다. 재일동포들이 당당하게 ‘백제인의 후손’으로 살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츠루하시의 히라노지역에는 고대 백제인들이 세운 사당인 구마다신사(杭全神社)가 있다. 교토 최고의 유적지인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를 지은 정이대장군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장군의 후손인 사카노우에노 마사미치(坂上當道)가 862년에 지은 사당이다. 이 밖에도 오사카에는 구다라역(百濟驛)과 백제 고관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구다라고(백제향, 百濟鄕) 등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나 시간관계상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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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통에 높다랗게 세워져 있는 백제문을 지나 300m쯤 가면 구정물이 흐르는 개천이 하나 나온다. 정화시설이 안되어 있는 탓인지 냄새 나는 이 개천은 ‘히라노가와(平野江)’라고 하는데 근세의 어둡던 시절인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치수사업을 한 곳이다. 그러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곳은 백제인들이 일찍이 터전을 잡아 보란 듯이 일본에 우수한 문화를 전수해준 곳이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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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츠루하시 시장에서 한나절을 보낸 우리는 동포가 운영하는 음식점으로 이동하여 땀도 식히고 오랜만에 보는 김치와 함께 맛난 점심을 들었다. 일본 음식이 잘 맞지 않아 고생하던 일부 답사단원들도 모처럼 흡족한 식사에 신이 났다. 식사 후에는 최낙훈 어르신이 마치 칵테일 하듯 손수 냉커피를 타서 나눠주어 인기를 끌었다. 천오백여 년 전! 오사카 츠루하시 학다리 근처엔 맑은 물이 흘렀다. 수십 마리의 학들이 날아와 놀고 갔다. 그곳에는 우수한 선진 문물을 가진 백제인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번창하던 모국 백제가 신라에게 패하고 나서 더는 학다리의 평화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그때까지 떠받들던 종주국 백제의 패망을 계기로 대화개신을 서둘러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고 부랴부랴 한반도를 멀리하는 역사서 편찬에 들어간다. 712년의 ≪고사기≫와 720년의 ≪일본서기≫ 등이 당시 작품이다. 그리고 숱한 세월이 지났다. 학이 놀던 개울은 사라지고 왕인박사가 노래하던 나니와(難波)항구도 육지로 바뀌었다. 그 자리엔 일본 군국주의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그리하여 1945년 이전까지 230여만 명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오사카를 비롯한 기타큐슈, 시모노세키, 홋카이도, 사할린 등지로 강제 연행되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이 귀국하지 못한 채 재일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땅에 남게 된 것이다. 참으로 따져보면 기구한 운명이었으며 고단한 삶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동포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옹기종기 모여 똬리를 틀었고 김치와 된장찌개로 고국을 잊지 않았으며 2세들에게는 고운 한복을 입히고 한국어를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츠루하시 시장을 둘러보면서 동포들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세월은 히라노강으로 흘려버리길 바랐다. 지금은 치수가 잘 안 돼 더러운 물이 흐르지만 다시 세월이 가고 하수도 정비가 제대로 되는 날 새물은 반드시 흐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비록 일제강점기 강제연행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정착이었기는 하지만 1,2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츠루하시 시장 한인들은 굳세게 살아남아 오사카를 넘어 일본의 손꼽히는 코리아타운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면서 답사단은 일본 인권의식의 현주소 우지시 우토로마을로 향했다. <제7편 일본 인권의식의 현주소 우지시 ‘우토르마을’과 오사카 ‘인권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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