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27년 노정, 지금 우리를 있게 한 자산 | |||
민족21 염규현 기자 | |||
“한 세기 전 나라가 망했을 때, 누가 망한 나라를 되살리겠다고 어떻게 애를 썼으며, 그러기 위해 자신과 가족을 어떻게 희생했는지 알리고 싶었다.” 이봉원 회장이 지난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에 맞춰 펴낸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 서문에 담긴 말이다. 역사전문가도 아니었던 그가 임시정부의 ‘고난의 27년 노정’을 온전히 발로 뛰어 책으로 펴낸 이유다. 그동안 무려 네 차례에 걸쳐 85일이란 긴 시간동안 넓은 중국 대륙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임시정부 당시 상황을 증언해 준 80~90세 어르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대담만도 50여 명에 이른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롭고도 고된 답사 여정. 하지만 이봉원 회장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만으로 길을 나섰다. 무엇이 그를 고난의 여정에 뛰어들게 했을까. “엉뚱한 곳에서 묵념하고 눈물 흘려서야 되겠나” 그를 임시정부 유적지 답사라는 여정으로 인도한 것은 다름 아닌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였다. 그동안 극단 대표, 방송PD, TV드라마 작가 등의 일을 해온 그가 국내 최초로 임시정부와 백범의 일생을 그린 TV드라마 16부작 〈백범 김구〉를 집필하게 된 것. 그는 제대로 된 드라마를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기존 학계의 자료를 바탕으로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예상 밖의 일들이 발생했다. 가지고 간 자료 중 틀린 부분이 적지 않았고, 이미 사라진 곳들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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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그가 다큐멘터리를 발표한 뒤 정부 역시 조사단을 파견해 다시 임시정부 유적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것은 2002년 발표되었고, 관련 학술회의가 성대히 치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잘못된 사실이 ‘역사’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선조들의 피와 눈물의 기록들이 잘못 기억되고, 잘못 기념되고 있는 것이다. 이봉원 회장이 가장 가슴 아파 하는 부분이다. “정부나 혹은 연구기관, 여러 기념사업회 등에서 해마다 중국으로 답사를 많이 가요.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선조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는 취지죠. 얼마나 좋아요. 하지만 문제는 잘못된 사전 지식으로 엉뚱한 곳에 가서 묵념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에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있어요. 그 분이 광복군으로 활동할 당시 충칭(重慶)에서 잠시 머물렀던 시골 마을이 있죠. 그 곳에 예전엔 세 채의 기와집이 있었고, 예배당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기와집 한 채만 남았죠. 그런데 몇 해 전 그 분의 손녀가 그 곳을 찾아 느낀 감회를 기행문으로 썼더라고요. 할아버지가 머물렀던 기와집을 보니 눈물이 났다는 내용이었죠. 그런데 사실 그 분은 그 기와집에 머물렀던 적이 없었거든요. 그 분은 다른 광복군들과 함께 예배당에 머물렀어요. 결국 엉뚱한 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그 분을 추억하는 거죠. 물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착오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문제죠. 어찌 보면 다른 이의 무덤 앞에서 우는 것과 같잖아요.” 햇살 아래 드러난 임시정부의 거처 이봉원 회장이 답사를 통해 새로이 찾아내거나 오류를 고친 임시정부 유적지, 자료는 적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새 날인면 사진,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탈출한 뒤 처음 임시 판공실을 두었던 항쩌우(杭州)의 청태제2여사, 1933년 5월 김구와 장제스가 회담했던 난징(南京)시 총통부 관저 소접견실 사진, 중국 창사(長沙)에 있었던 임정 청사, 서원북리 8호 건물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그가 펴낸 책에는 1939년 4월 임시정부 대가족이 꾸이양(貴陽)을 떠나 치쟝( 江)으로 갈 때, 버스 여섯 대로 넘은 72굽이 산길 사진, 미국과의 OSS훈련을 위해 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시안(西安)시 두곡마을의 주둔지 사진, 김구 주석이 해방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산시(陝西)성 주석 공관과 쭈사오쩌우 주석의 사진 등도 담겨있다. 하나하나 모두 그의 발길이 닿은 장소들이다. 일일이 사실관계를 확인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항쩌우 시절 첫 거처였던 청태제2여사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어쩌면 그가 아니었다면 영영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1932년 상하이. 윤봉길 의사의 가슴 통쾌한 의거. 놀란 일제는 상하이 내 프랑스 조계지까지 들어와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였다. 때문에 할 수 없이 피난을 가야 했던 임시정부가 새롭게 판공실을 꾸린 것이 항쩌우시의 청태제2여사였다. 당시 고급여관이었던 이곳은 손문이 머물기도 했던 유명한 곳이었다. 이봉원 회장은 백범기념관에서 가지고 있는 주소를 바탕으로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주소지에 적힌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주소 자체가 없었다. 잘못된 주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 회장은 시의 변두리까지 나가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청태제2여사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다리 아래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노인들이 이곳을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건물이 지금도 시내 중심가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노인들의 말대로 찾아간 곳은 군영여관. 그 사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이름이 바뀌었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이 회장은 지배인에게 청태제2여사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정작 지배인은 청태제2여사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 나오는 그의 머리 위로 환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열려는 순간, 이게 웬일인가. 두꺼운 현관 유리문에 ‘淸泰第2旅社’란 음각된 문구가 보이는 게 아닌가. 그 날 햇살이 비추지 않았고, 무심결에 지나갔다면 아마 청태제2여사는 찾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는 사진을 찍고, 새로운 주소를 적어 돌아왔다. 그리고 백범기념사업회에 알렸다. 이승만 띄우기에 열올리는 뉴라이트의 자가당착 이봉원 회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를 펴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임시정부의 27년 노정을 통해,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그렇지 않았는지를 똑바로 알리고 싶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비록 상식 수준의 지식일지라도, 알기 쉽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임시정부에 대하여 올바로 전달하자”는 마음으로 책을 써냈다. 뉴라이트 집단이 말하는 것처럼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가 아님을, 한성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보다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사실에 입각해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침략자와 부일 역적들에 의한 국권 상실의 역사와 그에 대항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로 시작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독립운동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이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는 이명박 정부, 그리고 뉴라이트가 건국절을 제기하고, 한성정부의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는 것 모두가 결국 ‘이승만 띄우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들이 ‘건국의 아버지’라 생각하는 이승만을 띄우기 위해 발버둥 치다보니 대한민국의 뿌리가 미군정에 있다는 둥, 외국 주둔군의 철권 통치기간을 민주주의의 모태라는 등의 헛소리를 늘어놓게 됐다는 것. 또한 그런 사고에 입각해 1919년이 아닌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 주장하고, 그 실체도 분명치 않은 한성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에 두려 한다는 것이다. “제가 어쩌면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학계보다 객관적으로 사실을 볼 수 있고, 또 정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발 물러서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죠. 허수아비 한성정부를 띄우고, 건국절을 제기하는 뉴라이트를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학술서가 아닌 누구나 쉽게,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느낀 거죠.”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광복회 김영일 회장은 이 책을 두고 “임시정부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루었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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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적어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임시정부 사적지 부문은 반드시 사실대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바로알기》가 그 대답이다. “이미 제가 찾아낸 사적지 중에 중국의 재개발 열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이 많아요.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도 언제 사라질지 모르죠. 임시정부 충칭 시절 3번째 청사였던 화평로(和平路) 청사 같은 경우가 그래요. 200년이 넘은 다 쓰러져 가는 초라한 곳이지만, 정말 눈물이 날 만큼 과거 선조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소중한 곳이에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후편을 쓰신 곳이기도 하고요. 이런 소중한 장소가 언제 사라질지 몰라요. 건물이라도 옮겨 독립기념관이나 효창공원에 복원하면 얼마나 의미가 있겠어요. 그런 소중한 장소, 유적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죠.” 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는 내년 1월 임시정부 27년의 노정을 따라가는 답사를 준비중이다. 경술국치 100년, 일제의 독도 침탈 야욕을 규탄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역사와 그 흔적들을 소홀히 하는 지금. 과연 건국절이란 이름으로 임시정부 27년의 기억을 이렇게 흘려버려도 되는지 두렵다. 사적지연구회 이윤옥 부회장의 말은 그래서 더욱 아프다.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건 35년이 아니라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투쟁했던 27년을 빼고 8년으로 말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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