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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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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과거청산 운동을 돌아보며


글·김민철


위협받고 있는 과거청산


원고 청탁을 받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부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혼란스럽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거청산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게 도대체 가능키나 할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마저 들기 때문이었다.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 만든 기구에서 진상규명을 밝히는 자료를 공개했다고 조사관을 해임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라든지, 5·18민중항쟁을 반란으로 인식하는 수준의 사람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수장으로 앉아 끝마무리를 책임지고 있는 상황들은 길게는 20년, 짧게는 6년 동안 국가가 법을 제정해 추진했던 과거청산의 기본 정신과 의미마저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다. 과거청산 또한 정치적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국가 기구를 만들 때의 목적이나 사회적 합의가 너무 쉽게 무시되거나 부정되어버리고 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국가 기구를 통한 과거청산 작업 또한 후퇴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이런 정도까지 퇴행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의 전반적 후퇴와 더불어 과거청산 또한 총체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와 과거청산이 매우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4월혁명 이후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으나 곧 이은 5·16군사쿠데타로 진상규명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탄압당한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성숙됨에 따라 과거청산도 함께 확대되고 성숙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직접 체험하고 있다.


이제 노무현정권기에 집중해서 출범했던 과거청산 관련 위원회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등 지원위원회라는 다소 생뚱맞은 이름의 위원회만 제외하곤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이마저 6개월 단위로 몇 차례 시한부 목숨을 연장하는 조직이니 사실상 잔여 업무를 처리하는 수준이라 하겠다. 친일 문제를 다룬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설립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이며, 소기의 목적 또한 완수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 여전히 수많은 미해결 과제가 남아 있다. 현 집권자의 잘못된 정치적 견해로 인해 존립 자체의 의미마저 부정되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존립할 이유가 없겠지만, 남은 과제는 어떻게 할 것이며, 기존의 성과는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올해 10월 초 4·9통일평화재단과 포럼 진실과정의가 공동 주최한 과거청산 대토론회-역사와 책임 : 한국 과거청산작업의 평가와 전망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열린 토론회였다. “광주 5·18에서 시작한 활동이 의문사위, 국정원 과거사위, 진실화해위 등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작업을 했다고 자평하지만, 내부 의견은 너무 다양하고, 활동의 성과는 지속되지 않고, 자료는 정리되지 않은 채 이명박 정부 들어서 새로운 인권침해 사건이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점점 더 이러한 공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이 당사자(피해자)와 국가의 관계 즉 소송제기, 법원의 판결 등 보상 문제로 제한되어버리는 상황”(초대장)을 타개하고 종합적인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이 자리에서 집중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은 진행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후속조치가 필요하며, 과거청산 문제를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했다는 정도이다.


기존의 성과를 계승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남은 과제가 무엇인지,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집단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상황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 그러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근본에서 생각하고 출발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한국 사회에서 과거청산이란



 


 


한국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과거청산 문제는 국가폭력과 인권, 피해자의 권리 회복이라는 한 축(강제동원/민간인학살/인권침해 등)과 공동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정치윤리 확립이라는 또 하나의 축(친일문제)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과제들이 모두 짧게는 20~30년, 길게는 100여 년 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적 특성이 잘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고 말하는 이 과거청산은 한국사회 변동의 특성, 즉 압축근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와 분단, 냉전과 독재, 그리고 민주화가 이 100년의 시간 안에 담겨있기에 그 상처 또한 치유될 겨를도 없이 겹겹으로 쌓여왔다. 따라서 한국의 과거청산은 과거에 일어난 죄를 다시 환기시켜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여 궁극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대하는 길로 연결되어 있다.



 


과거청산의 방법에 대해 역사가 볼프손(Wolffsohn)은 4W(Wissen[앎], Werte[가치], Weinen[슬퍼함], Wollen[의지])를 제안한 바 있다. 즉 과거청산이란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하고, 그 행위를 악한 것으로 가치를 판단해야 하고, 희생자를 위해 최소한 상징적으로 슬퍼해야 하며, 다른 좀 더 도덕적이고 일반적인 어떤 것으로 승화시키려는 의지를 내보이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책임 규명을 추가하여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식을 통해 과거청산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ⅰ 무엇이 일어났는가(진상 규명)
ⅱ 그때 일어난 일이 옳았는가 틀렸는가(가치)
ⅲ 피해자의 슬픔을 이해하고 같이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슬퍼함)
ⅳ 이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지가 있는가(의지)
ⅴ 일어난 일에 누가 어떤 책임이 있는가(책임 규명)


진상규명과 가치(정의의 실현),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하기(공감), 개선의 의지(제도 개선), 책임 규명 모두 순차적이거나 서열적인 것이 아니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와 관련해서는 피해자의 슬픔과 고통에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이것은 피해자의 관점에 선다는 것으로 피해자의 고통에 우리가 귀 기울이고 그것에 대해 응답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것과 함께 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선이 요구된다. 피해자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피해자의 고통과 슬픔을 드러내는 일이 필요하며, 그 슬픔을 사회화해야 한다.


수지김 사건은 피해자들의 고통이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재판에서 이긴 대표적인 사례이다. 재판과정에서 간첩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당했으며, 가족 자체가 완전히 붕괴되어 가는 과정과 실상을 수천장에 이르는 증언은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 증언은 법정의 그 어떤 논리보다도 강렬한 것이었기에 판사 또한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고 그 고통에 귀 기울인다면, 그리고 그 고통을 상상할 수라도 있다면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 사회화될 때 과거청산은 제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피해자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피해가 왜 일어났으며, 그 피해가 왜 오랫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성찰이 나오며, 피해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제도의 시선이 필요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피해가 왜 일어났으며, 지속되었나를 밝히는 일은 곧 가해자와 가해의 구조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도의 시선이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폭력이 가능했던 제도나 구조를 밝혀내는 일이며, 이는 곧 국가와 사회를 인간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해의 구조를 밝히는 일은 강력한 조사권한을 가진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만으로는 실현되지 않는다. 뉘른베르크재판이나 동경재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법적 처벌을 위한 전쟁 책임 규명 작업은 번번히 자료의 은닉, 인멸, 가해자의 저항 등으로 벽에 부딪혔다. 이것은 피해가 일어나게 된 구조적 요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가해자에 대한 조사만으로 가해의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권력의 연쇄 체계(입안자, 명령자, 행위자)를 밝혀야 하고, 권력의 연쇄 체계를 밝히는 일은 곧 체계의 어느 위치에 서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


과제를 안고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과거청산 관련 위원회의 활동에 과연 얼마의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 분명 후한 점수를 주지는 못할 것 같다. 지난 수년간 과거청산 관련 위원회들은 숨 가쁘게 일했으며, 나름의 성과도 거두웠다. 그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번거로움은 각 위원회의 보고서에 맡기는 게 나을 것 같다. 다만 각 위원회의 활동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문제를 인상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다음 몇 가지 정도가 되겠다.



 


과거청산 작업은 진상규명이 그 출발점이자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진상규명이 계속 지체되면서 관련 자료들은 더욱 인멸되고, 증언자의 확보도 더욱 어렵게 되었다. 특히 과거청산 작업은 대부분 국가권력이 자행한 인권침해 문제들인데 국가권력은 당시부터 이러한 문제들을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해왔다. 이처럼 힘 있는 국가권력이 은폐하고 차단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은 너무 긴 세월이 흐른 상태에서 그 자체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과거청산 기구들이 법률, 행정, 나아가 사회적으로 가장 최적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된 데다가 또 다루는 사안의 성격상 진상규명에 어려운 점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또한 구조적인 어려움에 비해 이를 해결할 전문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위원회가 한꺼번에 출범함에 따라 가뜩이나 부족한 전문역량이 분산되는 상황이 벌어져 진상규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문서 해독에서부터 보고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진상규명의 전 영역에 걸쳐 효율적인 인력 배치가 되지 못했다.


운영상의 문제도 있었다. 한시적인 위원회를 구성하는 활동가와 전문가(연구자), 그리고 행정관료의 세 그룹이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너무 오랫동안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내부 운영상 마찰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시간과 훈련, 그리고 인내로 해결될 문제였다.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많은 위원회가 출범했지만 그에 반해 사회적인 문제제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랬을까. 위원회는 기본적으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직이다.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 시민단체의 역할이라면 위원회는 그것을 풀어가는 조직이다. 즉 진상규명이라는 과제 자체만을 수행해내는 것도 버거웠다. 초기에는 행정을 정비하고 조직을 안정화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 진상규명에 착수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친일 문제의 경우 그나마 민족문제연구소가 20여 년 동안 자료와 조사 방법, 조사 대상자의 규모와 윤곽 등 많은 정보를 축적했고, 식민지시기에 대한 정보화사업이 비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은 비교적 쉽고 빠르게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위원회의 경우 학계의 뒷받침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만큼 진상규명 그 자체도 벅찬 과제였을 것이다.


각 위원회마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대체적인 문제는 유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간의 성과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 성과들을 어떻게 안고 갈 것인가가 지금부터의 과제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다시 사회가 맡은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의 집권을 약 1년 반 정도 남겨놓고 정부 차원의 과거 청산 관련 사업에 대한 과정과 평가, 그리고 과제 등을 정리한 백서를 준비하면서 위원회 이후의 과거청산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검토한 바 있다.






 ⅰ 진상규명사업 : 시간적 제약으로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진실규명작업을 주제별(친일/강제동원/민간인희생/인권유린)로 지속한다.
ⅱ 기념·추념(追念)사업 : 피해자의 한을 풀고, 피해자의 고통을 사회화한다.
ⅲ 교육사업 : 피해의 실태나 인권침해 사례 등을 교육함으로써 인권의 소중함을 체득하게 한다.
ⅳ 기록관리사업 : 통합적으로 자료를 관리하도록 자료관리의 종합성·일관성을 확보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자료를 공개한다.


위원회들이 문 닫은 지금,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회적인 과제들이다. 이 과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더 많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나가야하지 않을까.


 글 김민철 |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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