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 ‘미적’ 부끄러운 3·1절
ㆍ총리실, 각의 의결 앞두고 ‘19인 서훈 취소안’ 재검토
ㆍ친일재산 환수도 소극적
3·1절 92주년. 마땅히 기뻐해야 할 날, 그러나 부끄럽다. 친일 잔재는 도처에 남아 있고, 정부는 이 같은 잔재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국무총리실은 친일 행적이 확인된 장지연 등 독립유공자 19인의 서훈 취소안을 사실상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있다. 서훈 취소안은 지난해 11월 보훈처 서훈취소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돼 국무회의 의결만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총리실은 이들이 친일 이전에 독립운동을 했던 공적도 인정되기 때문에 ‘서훈 공적이 거짓일 경우’ 서훈을 취소하도록 한 상훈법 적용이 애매하다며 서훈 취소를 미루고 있다. 취소대상 19명 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년 11월 해산)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사람은 5인뿐이라는 이유도 댔다.
역사학계는 ‘서훈 취소 규모를 축소하려는 의도’라며 반발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19인은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친일행적이 증명됐고 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최종 보고서에도 해당 19인의 친일 행적이 모두 드러나 있다”고 반박했다.
이미 1996년에 서훈을 취소한 전례도 있다. 당시 친일 행적이 새롭게 드러난 서춘 등 5인의 서훈이 취소됐고, 별 논란 없이 김영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유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했지만 정부에 패했고 국립묘지에서 이장됐다.
당시 서훈 취소 심사에 참여했던 한 학자는 “김영삼 정부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안이라, 이런 걸림돌이 생길 줄 예상 못했다”며 “그만큼 현 정부의 친일 청산 의지가 소극적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비판했다. 역사학자들은 “인촌 김성수(고려대 설립자),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다른 인사들로 서훈 취소 흐름이 확산될까봐 시간을 끄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부는 친일파 후손들과의 재산환수 소송에서도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관련 소송 업무에 전문가를 배치하지 않아 어려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해산(2010년 7월) 후 소송 업무가 법무부로 이관됐을 때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묵살됐다. 소송 전담 인원도 5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소송을 맡아온 손영실 변호사는 “증거사료가 필요할 땐 조사위원들이 며칠이고 매달려 찾곤 했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아는 분에게 부탁해 자문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난해 말 가장 큰 액수(322억원)가 걸린 재산환수 취소소송 최종심에서 원고인 이해승의 후손에게 패했다. 대법원은 “이해승이 1910년 일본 왕실로부터 받은 작위가 한일강제병합의 공로인 점이 명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학계에선 역사학자들의 지원이 있었다면 재판 결과가 달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지난 2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이해승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고 5일 후 선산에서 작위 봉고식을 치렀다’는 역사 기록을 찾아냈다. “어쩔 수 없이 받았다”는 이해승 후손의 주장과 달리 “작위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법무부는 친일재산 환수와 관련해 앞으로 84건의 소송을 더 치러야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 사무처장을 지낸 장완익 변호사는 “이대로라면 어렵게 이룬 친일 청산 성과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경향신문>, 201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