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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편만 되세요. 악질 친일파도 지켜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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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946년 3월 2일

1942년 12월 박흥식(1903~1994년)은 전 일본 산업 경제 간담회에 참석해서 천황을 알현한 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拜謁의 光榮의 感泣”이란 글을 올렸다. 1년 후 1943년 12월 17일자 같은 신문에 “拜謁 1週年 – 至誠으로 捧供”이란 글을 또 올렸는데, 그 일부 내용을 <친일 인명 사전>에서 옮겨놓는다.

“나는 산업 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욕(浴)하였는데, 지척에서 용안을 봉배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산업 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 황공하옵신 대어심(大御心)에 봉부코자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대동아 전쟁 이래 우리 반도 2500만의 적자(赤子)가 얼마나 황민됨에 자각을 높여 얼마나 성업 익찬을 위해서 지성을 다해 왔느냐 하는 데 대햐여 나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내지 동포와 같이 참다운 일체가 되어 대동아 전쟁의 필승과 더불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전체를 바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단언할 수 있어 그것을 경축하는 바입니다.”


그 무렵 쏟아져 나오던 문자 중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경제계 인사의 글로는 두드러진 것이다. 박흥식은 조선 경제계에서 단연 두드러진 친일파였다. 식민지 시대를 통해 조선인으로서 “배알의 광영에 욕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지만, 진심으로 광영을 느낄 만큼 희귀한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친일파가 할 만한 일을 박흥식은 빠짐없이 찾아서 했거니와, 다른 친일파가 못할 일을 그가 한 것이 하나 있다. 1944년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세운 것이다. 친일파 재산가들의 최고의 ‘애국’ 행위가 비행기 헌납이었다. ‘광산왕’ 최창학이 1941년에 군용기 6대 제작비 40만 원을 헌납하여 ‘애국’계의 전설적 존재가 되었는데, 박흥식은 자본금 5000만 원으로 비행기 제작 회사를 세워 신화적 존재가 된 셈이다. 회사 설립 취지서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역시 <친일 인명 사전>에서 재인용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루라도 속히 우리들의 땀과 피로써 된 비행기로 전쟁에 보내기가 주야 염원이던 바, 더욱이 금년은 징병 실시의 기념할 해이고 보니 지원병 학병에 연이어 충용한 반도 장정은 전원이 들어 황군정강(皇軍精强)에 새로운 위력을 더할 때라. 이때 적 격멸의 제일 무기인 정예한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제작하여 결전장으로 보내어 우리 황군이 이를 구사함으로써 동아의 숙적을 격멸하는 날 그 감격을 어디에다 비할 것인가.”

1949년 1월 반민특위의 제1호 체포자가 박흥식이었던 것은 친일파로서 그의 명성에 걸맞은 일이었다. 악질 고등계 형사들도, 총독부 고관들도, 그의 거대하고 호쾌한 전쟁 지원 친일 사업 앞에서는 무색할 정도다.

그런 박흥식을 1946년 2월 26일 서울법원 검사국이 기소했다. 혐의는 군정포고령 위반 및 횡령죄. 8·15 이후 일반 시민에게 배급할 포목, 잡화를 부정 매매하여 400만 원의 폭리를 취득하고 비행기 회사 청산 정리 자금으로 일본 육군성에서 받은 5000만 원 중 2000만 원을 횡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2월 15일 수감된 박흥식이 몇 시간 만에 풀려났다가 이틀 후 도로 수감되어 물의를 빚은 일이 있었다.

법무국 활동으로 재수감 – 의혹의 的 화신 박흥식 사장 사건 진상

화신 사장 박흥식(44세) 씨를 폭리 취체와 배임죄로 서울법원 검사국에서 취조 중 점좌 사실이 확연하고 또 본인으로부터 여러 사실을 시인하여 지난 15일 서울형무소에 수용하였던 바 입옥 세 시간 만에 명령 계통도 알 수 없게 군정국 국방국장 챔펜이 대좌가 직접 검사장을 서울 감옥에까지 동행케 하여 가지고 석방시켜 세상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 사건의 전말을 책임 당국자에게 들으면 다음과 같다.

국방국장 챔펜이 대좌가 15일 경기경찰부장을 찾아가서 박흥식 씨 감금한 이유를 물은 결과 검사국에서 직접 지휘한 사실을 알자 장 경찰부장의 안내로 다시 대법원장을 찾아가 가지고 그 길로 김용찬 검사장과 같이 서울형무소로 가서 박흥식 씨는 아무런 죄도 없으므로 우리가 맡아서 처리할 터이니 곧 내어놓으라고 하자 김 검사장은 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법무국장의 명령이 아니니까 내어놓을 수 없다 하였으나 이는 하지 장군의 명령이라 하므로 할 수 없이 김 검사장은 출옥을 승인하였는데 어느 틈엔지 박흥식 씨의 자동차가 감옥 문에 대기하였다가 그를 태우고 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 관계 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법원 검사총장 이종성 씨 담 : “박흥식을 지방검사국에서 취조한 결과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최고 방침에 의하여 구금한 것이고 8·15 이전 박흥식의 행동으로 보아 누구나 그의 행동이 타당타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6일 밤에 대법원장에게 이 사실을 듣고 그대로 있을 수 없어 김용무 씨와 경기도 경찰부로 달려갔으나 벌써 일은 지난 뒤이라 할 수 없이 그날 밤은 분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래서야 어느 누가 군정을 협력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 이튿날 3법원 검사장은 온 직원의 전 직원의 총의를 어깨에 지고 법무국을 통하여 사실을 규명하였는데, 결국 박흥식을 일시 맡았을 뿐이고 법원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군정청에서 직접 신원을 다시 감옥으로 넘기어 수감케 되었다.

서울법원 검사정 김용찬 씨 담 : 하지 장군의 명령을 복종치 않음은 군정을 부인하는 사실이 될 수도 있다. 장관의 명령이 없으니 발표할 수 없다. 하여간 시간이 해결지을 것이다.

서울법원장 김용무 씨 담 : 법무국의 진력으로 범인은 재수감되었고 수사진의 진의를 그들도 잘 알게 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다만 이 사건의 발단은 소위 영어마디나 하는 자의 중간 모략으로 군정을 모독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자유신문> 1946년 2월 19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김용무 법원장이 “소위 영어마디나 하는 자”라 한 것은 장택상 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목한 것이 분명하다. 기사 중에 챔피니(A. S. Champeny) 대령이 장택상을 찾아갔다가 앞장서서 박흥식을 석방시키며 하지의 명령까지 들먹였다고 하는데, 장택상의 “중간 모략”이 훤히 보인다. 장택상이 챔피니를 앞장세운 것, 하지의 명령을 조작해 놓고는 통역 실수로 미룬 것을 누가 짐작치 못하겠는가.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뒷맛을 더욱 씁쓸하게 하는 것이 3월 3일 법무국 형사과장 최종석의 담화문이었다.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이다.

지난 2월 15일 박흥식의 석방 문제는 우리 사법계에 큰 충동을 주었는데 결과에 있어서는 그 충동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법부는 더욱 반성을 굳게 하고 신념을 굳게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역할을 한 무지한 책동배 왜적 지배 시대에 일본인이면 무슨 일이라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버릇을 곧 청산하기를 희망하는 바이며 그리고 일부에서는 박흥식이가 친일파 민족 반역자이기 때문에 검거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같으나 오늘의 우리 사법 기관에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검거할 권한이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서울신문> 1946년 3월 3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서 검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굳이 강조해야 했을까? 친일파 처단을 군정청이 가로막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을 은연중 토로한 것일까, 아니면 친일파 처단을 바라는 민심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것일까? 법무국 쪽에서 나온 얘기인 것을 보면 불만의 토로 같다.

조병옥과 장택상의 경찰이 친일파의 아성이 되고 있는 데 검찰이 불만을 갖고 있던 것이 당시 검-경 대립의 기본 양상이었다. 당시 검사로 활동하던 선우종원의 회고에도 이 양상이 드러나 있다.

게다가 통역관들이 거짓 통역을 해서 죄가 되게끔 만들어버렸어요. ‘예스’라고 해야 되는 걸 ‘노’라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유죄를 만들어서 형무소로 보내는 걸 우리가 봤어요. 그런데 검찰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일이거든. 우리 같은 젊은 검사들이 정의감에 불타 통역관을 잡아넣었어요. 그리고 군정장관한테 연락해서 사건을 다시 받아와서 무죄 석방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 일이 많았지요.

그렇게 하니까 구속된 놈들이 형무소에 가서 자기를 잡아넣은 검사가 공산주의자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아마 그때 내가 실언을 좀 했을 거예요. 나도 26살밖에 안 됐을 때니까, 이를테면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자식아, 우리가 일본 놈한테 억눌려 산 것만 해도 분한데, 상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미국 놈한테 붙어서 한국 사람을 괴롭히냐?”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서 ‘검사가 반미주의자다’ 떠들고 다니는 거죠. 재판 끝나면 선우 아무개 검사 구속한다, 몇 년 징역을 보내겠다, 그런 이야기까지 떠돌았어요. (<8·15의 기억>, 116~117쪽)


박흥식 석방 사건은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대표적 친일 인사를 경기도 경찰부장이 군정청 대령을 끌고 와 하지 사령관의 명령을 빙자해 풀어놓다니, 검사국 최고 간부의 입에서 “이래서야 어느 누가 군정을 협력할 수 있겠는가.” 한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온 백성이 바라는 친일파 처단을 회피하려면 ‘꼬리 자르기’ 전술을 써야 할 때였다. 상징적 인물 몇을 희생시켜 민심을 호도하는 전술. 이승만이 정치자금 조달을 위해 1945년 12월 중순 친일파 자본가들을 주축으로 경제보국회를 만들 때 박흥식이 제외된 것도 친일파로서 상징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물까지 감싸는 것은 친일파 전체에 대한 인민의 적개심을 더욱 격화시키는 길이었다.

경제보국회에도 끼워주지 않은 박흥식, 그가 좌익 쪽에도 돈 뿌리는 것으로 소문났던 것은 자구책 강구에 다급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박흥식까지 풀어주려고 장택상이 나섰던 것은 ‘정면 돌파’ 전략이었을까? 민심을 상대로는 “친일파 처단? 꿈도 꾸지 마!” 오금을 박아주고, 친일파를 상대로는 “우리 편만 되세요. 천하의 박흥식이라도 지켜주지 않습니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을까?

박흥식의 5000만 원에 관해서는 1월 6일자 일기에서도 이야기했었다. 박흥식은 이 사건 재판에서 징역 3년에 벌금 200만 원을 구형받았으나 5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4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공민권 정지 2년형을 구형받았다가 9월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961년 쿠데타 직후 부정 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7월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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