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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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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기섭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청장년층의 교육을 통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으로 이 글은 선생의 외손자인 정철승 변호사가 하늘에 계시는 조부께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철승 변호사는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고문변호사 겸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100년 편지






마흔 일곱번째 편지 – 2011년 3월 1일        





100년 편지












 












할아버지(윤기섭)께 여쭤볼 것이 많습니다.







할아버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이 영하 17도까지 내려가서 10년 만에 닥친 한파니 뭐니 하며 아우성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100년 전인 1911년 망국을 통곡하시며 동지들과 함께 만주 땅 서간도 유하현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셨던 그 암담했던 시절의 겨울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초봄의 훈기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 윤기섭 선생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의 학감과 교장으로 재직하시며 독립군이자 장래 조국의 동량이 될 젊은이들의 교육에 혼신을 다 바치셨습니다. 어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당시의 할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草)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저는 항상 할아버지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할아버지는 1887년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하시다 신학문에 뜻을 두고 서울 보성학교를 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하셨던 엘리트 지식인이셨습니다. 당시의 애국적 지식인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할아버지는 오산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신민회에 가입하여 민족교육사업과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셨습니다.


이처럼 헌신적인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독립방략 중 전형적인 실력배양노선을 걸으시던 할아버지는 망명 후부터는 무장독립투쟁노선으로 선회하셔서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셨습니다. 심지어 일제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무장투쟁의 승산이 사실상 없어진 상황에서도 할아버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힘을 길러서 반드시 우리 힘으로 일본을 몰아내야만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훗날 상해임시정부에 합류하신 후에도 지금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군무부장을 맡으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할아버지는 그러한 신념을 계속 지켜나가셨던 것 같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창백한 인텔리’에 그칠 수 있었던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그런 불굴의 투쟁의지와 독립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갖게 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일관되게 견지오실 수 있었는지 저는 매우 놀랍고 궁금했습니다.


참, 할아버지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재로 사용된 [보병초학(步兵初學)], [보병조전(步兵操典)], [사격교범(射擊敎範)], [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등의 군사 서적들을 저술하셨지요. 저는 호기심에 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보병조전을 읽어 보았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저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체계적인 군사훈련서더군요. 도대체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아보셨을 리 없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런 책들을 만들어 내셨는지 불가사의했습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1921년 11월경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셨던 사실을 보면 단순히 비현실적인 당위론에만 매달려 계셨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실력배양노선, 무장독립투쟁노선 그리고 외교노선까지, 당시의 모든 독립운동 방략들을 전부 시도해보셨던 셈입니다. 당시 각 독립운동 진영들이 서로 협력하지 못하고 각자 자신들이 옳다고 믿던 노선만을 고집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할아버지는 다소 독특한 분으로 여겨지셨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다행히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하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안창호, 이회영, 김규식, 김구, 이승만, 지청천, 이범석, 김원봉 등 다양한 독립노선과 이념을 가진 독립지사들과 두루 교분을 유지하시며 대일 통일전선을 위한 민족유일당 운동 및 좌우합작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임시정부에서는 지금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 의장직까지 맡으셨으니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줄곧 중도노선을 지키면서 좌우 이념 대립과 분열로 민족의 독립역량이 헛되어 소모되지 않도록 애쓰셨는데, 이를 위해 늘 자신보다는 동지들을 먼저 보살피는 삶의 태도를 가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꿈에 그리던 광복이 왔음에도 할아버지는 환국을 서두르는 다른 임정 요인들과는 달리 중경 임시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아 잔무를 정리하고 임정 가족 225명을 인솔하여 함께 귀국하셨습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정치적 공백 상태가 된 해방 조국에 빨리 귀국하여 새 나라의 지도자로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겠다는 생각은 오랜 세월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써온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텐데 그 당시 할아버지는 참으로 초연하셨습니다.


평생 옳은 뜻과 의지를 지키며 온갖 희생을 무릅쓰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러한 훌륭한 삶을 보상받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리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러한 어려운 일들을 일관된 삶의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담담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그러한 삶을 돌이켜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의문이 있습니다. 분명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이 적지 않으셨을텐데 어떻게 그처럼 한결같은 삶의 길을 걸으실 수 있으셨는지? 그것이 타고난 천성인지, 공부의 결과인지 아니면 남 모르는 어떤 강렬한 인생의 경험 때문인지 저는 너무나 궁금합니다.


저는 제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를 고귀한 성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주저하고 두려워하며 번민하면서도 결국에는 옳은 길을 용감하게 걸어가셨던 어른이라고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는 너무나 초월한 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6.25 사변때 납북된 후에도 여러 납북된 애국지사들과 함께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1959년 운명하시면서 남기신 아래 유언을 전해 듣고 비로소 할아버지도 인간적인 번민 속에서 다만 신념을 지켜나가신 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일을 못보고 가는 것이 한이다. 갈라진 조국을 후세에 물려주게 되어 죄가 크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가니 허망하다. 남한에 있는 자식들이 보고 싶구나. 살아들 있는지 다시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야 없지. 남부끄럽지 않게 살다 죽었다는 것을 후세들에게 전해다오. 70평생 모든 것을 나라의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받쳤건만…..”


할아버지의 숭고한 희생 덕분에 저희 후세는 자랑스러운 조국에서 세계와 어깨를 겨루며 당당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희들이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번영을 염원하신 할아버지의 무거운 짐을 이어 받겠습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정철승


규운 윤기섭 선생 외손, 변호사








윤기섭 [尹琦燮, 1881~1950] 


1911년 간도에서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등과 군관양성을 위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신흥학교의 교사로 10여년간을 재직했다.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23년 6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의장에 선출되었다.


군사교육서인《보병조전 步兵操典》을 발간했으며, 1926년 김구(金九) 내각에 이규홍(李圭洪)·김철(金澈) 등과 입각하여 선전을 책임지고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개헌안 기초위원, 1930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1933년 군무차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았으며,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김원봉(金元鳳)이 주임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학편찬위원 부주임을 맡아 활동했다.


8·15광복 뒤 귀국하여 1946년 좌익세력의 연합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부의장·상임위원을 지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맡았으나, 6·25전쟁 때 북한에 납북되었다. 그 뒤 1959년 북한 정권은 그를 반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했다. 한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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