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섬에 1944년 6월15일 미군이 상륙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전체를 통솔하던 지휘부인 대본영(大本營)은 어설픈 반격이 무위로 끝나자 열흘 뒤인 6월25일 사이판 탈환을 단념키로 결정한다. 이 결정으로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패전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쿠릴열도-오가사와라 제도-뉴기니아 서부-버마를 잇는 일본군 ‘절대방위권’의 동쪽이 허물어졌고, 이 충격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도 붕괴됐다. 사이판에서 출격한 미군 B29폭격기는 일본 열도로 곧바로 날아가 공습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이판이 돌파당하면서 도조 후임으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패색이 짙은 일본의 총리에 올랐고, 대본영은 기사회생의 결전을 다짐하며 ‘쇼고(捷號) 작전’을 세웠다. 연패에서 한 번쯤 이겨보자는 필승의 염원을 작전명에 담은 것이다. 하지만 개전 초기 일본의 기습으로 호주로 패퇴해 절치부심하던 더글러스 맥아더(당시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가 1944년 10월 필리핀 탈환에 나서자 ‘쇼고’는 통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대본영은 일본 본토 사수에 전력을 집중한다.
일본 방위청이 펴낸 100권짜리 <전사총서(戰史叢書)>는 “일본이 (미군의)공습으로 한 해(1944년)를 보내고 폭격으로 새해(1945년)를 맞았다”고 했다. 미군의 필리핀 공격이 시작될 무렵 대본영은 일본 나가노(長野)현 마쓰시로(松代) 일대에 거대한 지하 대피시설을 몰래 파기 시작했다. 대본영의 지하방공호이자 일왕의 대피소였다. 공정이 80~90% 정도 끝난 상태에서 종전을 맞은 이 지하 대피소는 높이 2~3m에 총길이가 9510m에 달했다. 일제의 전쟁 집착을 웅변하는 증거다.
국무총리 직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일왕 대피소 건설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피해를 조사한 보고서에서 7000여명이 노무자로 끌려가 많게는 650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했다. 일왕 대피소에도 조선인의 희생이 묻혀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구체적 피해실태를 모른다는 점이다. 친일-항일의 잣대 밖에 있어 여전히 ‘추정’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 일제강점기 해외 강제동원 피해자가 400만명에 달한다. 3·1절을 92번이나 맞이해도 우리 안의 일제는 청산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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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日王) 대피소
By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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