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시장 이인재)가 백선엽(90) 장군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과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살아있는 친일파를 기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파주시는 경기도로부터 2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내에 선양비를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파주시는 이를 위해 추진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사업에 착수했으며 4월까지 선양비를 비롯한 조형물 설치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 조형물은 6.25당시 1시단의 전투장면을 형상화한 청동 부조 1점과 헌시, 준공기 및 전투승리 공적 등을 기록한 비각 2개, 참전용사 명단을 적은 돌기둥 4개로 구성돼 있으며 가로 16.2m, 세로 8.85m, 높이 4.35m 규모다.
파주시는 이 사업을 통해 ▲6.25를 모르는 후대에 6.25 실상을 알리고, 안보교육장으로 활용 안보의식 고취 ▲백선엽 장군 및 6.25 참전용사의 애국심 및 전공 전파 ▲6.25 참전용사들의 자긍심 고취 ▲안보관광 자원으로 활용 등의 기대효과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임진각에 설치될 ‘6.25 참전용사 및 백선엽 장군 선양비’ 조감도 시안. ⓒ시민대책위 제공
문제는 이 사업을 통해 기리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친일행적이 뚜렷한 백선엽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백선엽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될 정도로 친일행적이 뚜렷한 인물이다.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국 중위 출신으로 독립운동토벌에 앞장섰던 악명높은 간도토벌대(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결국, 현재 살아있는 ‘친일파’를 기리는 꼴이 돼버린 것이다. 이에 시민사회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광복회 파주시지회,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를 비롯한 파주시 내 시민사회단체들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은 이에 작년 하반기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건립 반대 파주시민대책위원회‘(시민대책위)를 꾸리고 이 사업을 폐기하라고 촉구해 나섰다.
시민대책위는 “파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건립은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전면 백지화 되어야 한다”면서 “친일인사 백선엽 동상건립을 위해 배정된 예산을 전면 삭감하고, 독립유공사업 예산으로 전환 편성할 것”을 촉구했다.
시민대책위는 그동안 기자회견과 1인시위, 서명운동 등을 통해 백선엽 선양사업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쳐왔다.
시민대책위 이재희 집행위원장은 “파주시민들은 어이 없어 한다”면서 “백선엽이 파주 사람도 아니고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인데 굳이 돈을 들여가면서 왜 이런 사업을 하느냐는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이인재 파주시장은 몇차례 공식석상에서 시민대책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23일에는 파주 월롱파출소 개소식 축사에서 “파주는 안보요충지이며, 백선엽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리시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업적을 쌓았으며 선양해야 한다”고 밝히고 “시장으로서, 국가관도 없는 소수의 망동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선양사업을 반드시 완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해 11월26일에는 임진각 광장에서 열린 ‘연평도 북한 무력도발 규탄대회’에 참석해 “백선엽 장군 동상을 만들자고 했더니 ‘보수꼴통’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자주포를 쏘는 북한만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 내부에도 적이 있으며 파주는 더 이상 친북좌파가 준동하는 장이 아니다”라고 시민대책위측을 맹비난했다.
시민대책위측은 파주시장의 이런 태도에 대해 어이없다는 입장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김철기 지부장은 “파주시장이 너무 막말을 한다”면서 “외부세력이니 국가관이 없는 소수니, 친북좌파니 하는데 그런 식으로 대응을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 지부장은 “호국영령을 기리는 사업만 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백선엽이라는 개인을 기리는 사업을 위해 공적인 돈인 경기도비 2억 원을 쓴다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6.25때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명백하게 일제시대때 과도 있는데 그런 인물을 어떻게 국민 혈세로 기릴 수 있느냐”라면서 “교육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파주시 관계자는 ‘살아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과거 친일행적이 명확한 인물을 기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백선엽 장군에 대한 선양이 아니라 6.25참전용사와 당시 1사단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유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면서 “그분을 부각하려고 한게 아니라 군대나 단체에는 대표가 이끄니만큼 그것을 현실적으로 반영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기도에서 도비 2억 원을 지원한 명목은 ‘백선엽 장군 선양비’로 돼 있다. 파주시에서 작성한 사업 문건 제목도 ‘6.25 파주시 참전용사 및 백선엽 장군 선양사업’으로 돼 있다.
앞서 지난해 파주시는 자유로 일대 대형광고판에 ‘함께 지켜낸 대한민국.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글과 백선엽의 사진을 내걸었다가 비판여론에 이를 교체하기도 했다.
한편, 시민대책위는 시안 최종확정을 위한 선양사업추진위원회 회의를 막기 위해 지난 15일부터 파주시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벌이고 있다.

파주시가 경기도비를 지원받아 추진하고 있는 ‘6.25 참전용사 및 백선엽 장군 선양사업’ 조형물에 들어갈 청동부조물 시안. 가운데 크게 자리잡은 인물이 백선엽이다. ⓒ시민대책위 제공
‘간도특설대’ 중위 출신 백선엽의 친일행적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인 백선엽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분류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선엽은 1939년 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뒤 이듬해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42년 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백선엽은 자무쓰(佳木斯)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에서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기관총·박격포중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에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를 받아들여 옌지현(延吉縣) 특무기관장 겸 젠다오지구 고문인 오고에(小越信雄) 중좌가 주도해서 만든 조선인 특수부대로 악명이 자자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으며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다.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선엽은 일제가 패망한 뒤 평안남도 도인민위원회 치안대장과 평양에 있던 조만식의 비서를 잠시 지낸 뒤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백일.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했다. 그뒤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뒤 1946년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지난 2009년 국방부는 한국전쟁 6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을 명예원수(5성장군)로 추대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이를 취소한 바 있다. 백선엽 친일이력과 더불어 광복군을 정신적 뿌리로 하는 국군의 건국이념을 훼손한다며 군 원로들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부 김철기 지부장은 백선엽에 대해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면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면서 “간도특설대의 주 활동은 팔로군을 잡는 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잡는 행적을 했다”면서 “이런 인물을 기리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