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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아킬레스건” 건드리는 친일사전 편찬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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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19일 오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한 누리꾼 모금액이 목표치인 5억원을 넘은 것을 기념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제 민족의 과제인 친일파 청산 활동에 참여한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연구소에 이어 나와 인연이 깊다. 특히 95년 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름이 바뀐 뒤 많은 사람들이 두 연구소를 헷갈려 했는데 어쩌면 상당부분 인맥이 겹치는 탓도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 선생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한 사이이기도 하고 많은 일을 서로 의논하며 의지해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실무자들과도 나이를 떠나 의견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조세열 사무총장, 박한용 연구실장, 김민철 책임연구원 등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상일을 논하고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럴 때면 이들은 종종 “젊은이들에게도 말할 짬을 달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지는 버릇 탓에 “선생님은 혼자서만 말씀하신다”고 타박을 하며 “저희들도 얘기할 틈 좀 주십시오라는 말을 추임새로 여기시는 모양”이라고 애정 어린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 등으로 참여했는데 특별한 느낌을 주는 단체다. 80년대 많은 학술단체들이 실천적 연구를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민족연구소만큼 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는 없었다. 11평 남짓 되는, 세탁소 2층 사무실에서 상근자 4명이 시작해서 이제는 월 회비를 내는 회원만 6000여명에 상근자도 수십명이니, 민간 연구소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로 성장했다. 민족연구소가 이렇게 발전한 데에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친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지난달 20돌을 맞아 조촐한 기념식을 했지만 91년 개소할 때만 해도 연구소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염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친일’은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역대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금기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기득권 세력의 주류가 혈연·학연 등으로 똘똘 뭉친 친일파들인 마당에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연구소의 끈질긴 노력은 철옹성 같은 친일파의 아성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등 대중 서적이 발간되면서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커져갔다. 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지지하는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은 지식인 사회가 친일청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교수사회가 본래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일에도 크게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모금을 시작한 지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이 모이고 그 뒤에도 계속 성금이 답지했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듯 이를 지켜보았다. 역사는 역시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현실에서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2002년 구성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지도위원을 맡아 감수에 참여했다. 지도위원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저명 교수와 학자, 시민사회 원로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집필한 원고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의견을 내고 방향을 잡아주는 구실을 맡았다. 나는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정도를 강조했다. 하나는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건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이 상식의 바탕 위에서 서술해야 합리성과 객관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출세형과 생계형 친일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간접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만이 아니라 편찬을 맡은 구성원들이 모두 공감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를 위한 장치를 설정했다. 우리는 결코 폭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윤경로 교수(한성대)는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사에서 “사전에 수록된 개개인에게 역사의 책임을 묻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정리와 역사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후대에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한 데 있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립니다”라고 썼다.

역사학자 이이화


<한겨레> 201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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