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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은 나왔지만 서훈취소 등 ‘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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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2005년 8월2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3090명을 발표하고 있다. 필자(오른쪽 둘째 모자 쓴 이)는 ‘감수’를 맡아 2009년 8월 발간이 완료될 때까지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1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을 발족하고 그 산하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설치했다. 2004년 초 국민모금 운동이 번진 덕분에 극적으로 기금을 마련한 친일사전 편찬 작업은 출발할 때부터 말할 나위도 없이 말들이 많았다.


극소수지만 어떤 분들은 ‘주요 친일인물 몇백명만 싣자’라든지, ‘마지못해 친일한 인사를 제외하자’라든지 하는 상식 밖의 주장을 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이는 다분히 억울한 사람을 가려내자는 게 아니라 아무개 언론사의 창업주 같은 세력가들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였다. 또 공청회나 명단 발표가 있을 적에는 친일파 후손이나 퍼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와 방해를 놓기도 했는데, ‘사실규명이 잘못되었다’고 떠드는 수준은 그래도 순진하게 보였지만, ‘빨갱이들이 모여 민족분열을 일삼는다’고 호통을 칠 적에는 어이없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했다. 또 당시 천도교의 아무개 교령은 청와대 모임에 참석해 민족종교인 천도교 인사가 열몇명 수록되었다고 떠들기도 하고, 천도교 인사의 친일행각을 공식으로 사죄한 천도교 지도자 박남수씨를 교단에서 제명하기도 했다.


막바지 출간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2009년 출간 보고회 행사장이 외부세력의 압력으로 취소되는가 하면 박정희를 지지하는 노인들이 떼로 몰려와 연구소에 달걀을 던져대는 소극도 벌어졌다. 만주 관동군의 장교였던 박정희가 수록된 걸 불만으로 여긴 것이다. 박정희 지지세력은 ‘일제에 일사봉공(一死奉公)하겠다’는 만주군관학교 지원 당시 박정희의 혈서가 공개되자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 혈서 공개는 그의 아들 박지만의 친일인명사전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비롯되었다. 사전 편찬은 특정인을 목표로 진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은 긁어 부스럼이라 할 만했다. 객관적 사실만을 기재한 사전에 대해 상식 밖의 주장으로 발간과 배포 금지를 요구하니 연구소가 부득이 대응하게 된 것이다. 현재까지 화가 장우성, 검사 엄상섭, 언론인 장지연, 박정희와 그의 동서 홍순일 등의 후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사법부는 일관되게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과 정당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친일인명사전은 갖가지 방해를 받으면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쳐 몇차례나 연기된 끝에 2009년 8월 끝내 발간됐다. 이어 그해 11월8일 백범 묘역에서 발간 국민보고대회도 열렸다.

나는 감수라는 형식을 빌려 초고를 꼼꼼히 검토했다. 내 전공분야에 속하는 인물 중심으로 살폈고 제도용어나 한자의 오류를 찾는 수준이었다. 그 방대한 내용을 내가 다 알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살피면서 실로 대단한 작업을 해낸 연구소와 편찬위원회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사전은 연구소 출범 18년, 편찬위원회 구성 8년 만에 이루어진 쾌거였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사전의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전제하고 “이 사전에 등재된 이들의 유족이나 연고자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시하면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관련자들의 고뇌와 번민을 고려하면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 겸허하고 냉철해져야만 한다”고 밝혔는데 오만하지 않아서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이 사전은 수백명의 필진이 참여한 해방 이후 최대·최고의 전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제 사전이 나오고도 1년이 훌쩍 넘었다. 한데 이명박정부는 이를 마무리짓는 일에 태만하고 있다. 하나의 보기를 들어보자. 2010년 보훈처 서훈취소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친일행적이 뚜렷한 장지연 등 19인의 서훈 취소를 통과시켰다. 이 취소안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국무총리실에서는 이 절차를 미루고 있다. 다분히 적당히 깔아뭉개려는 의도로 보이고 또 김성수나 박정희 등의 서훈 취소 요구로 진행될까봐 눈치를 살피는 꼴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아쉬운 것은 사전이 출간되었는데도 이런 성과에 대해 본격적인 학계의 평가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흔한 학술 관련 수상도 한번 못했고 공공도서관에서도 구입을 하지 않거나 미루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러니 친일문제는 아직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시민들의 성원에 힘입어 조용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1질 3책’ 30만원의 고가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구매를 해서 역사자료관 건립의 기금이 되어주고 있으며 필자들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본다. 연구소가 계획하고 있는 <친일문제연구총서>는 최소한 앞으로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또 식민지 시기의 민중생활사 자료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기득권 아킬레스건” 건드리는 친일사전 편찬위 참여 (3.25)


 










2004년 1월19일 오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가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한 누리꾼 모금액이 목표치인 5억원을 넘은 것을 기념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제 민족의 과제인 친일파 청산 활동에 참여한 기억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역사문제연구소에 이어 나와 인연이 깊다. 특히 95년 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이름이 바뀐 뒤 많은 사람들이 두 연구소를 헷갈려 했는데 어쩌면 상당부분 인맥이 겹치는 탓도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 선생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나와 함께 고락을 같이한 사이이기도 하고 많은 일을 서로 의논하며 의지해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실무자들과도 나이를 떠나 의견을 주고받으며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조세열 사무총장, 박한용 연구실장, 김민철 책임연구원 등과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상일을 논하고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럴 때면 이들은 종종 “젊은이들에게도 말할 짬을 달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술이 몇 잔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지는 버릇 탓에 “선생님은 혼자서만 말씀하신다”고 타박을 하며 “저희들도 얘기할 틈 좀 주십시오라는 말을 추임새로 여기시는 모양”이라고 애정 어린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는 초창기부터 지도위원 등으로 참여했는데 특별한 느낌을 주는 단체다. 80년대 많은 학술단체들이 실천적 연구를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민족연구소만큼 이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사례는 없었다. 11평 남짓 되는, 세탁소 2층 사무실에서 상근자 4명이 시작해서 이제는 월 회비를 내는 회원만 6000여명에 상근자도 수십명이니, 민간 연구소로서는 보기 드문 규모로 성장했다. 민족연구소가 이렇게 발전한 데에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친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작용했다.


지난달 20돌을 맞아 조촐한 기념식을 했지만 91년 개소할 때만 해도 연구소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염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친일’은 이승만 독재정권에서 역대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금기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기득권 세력의 주류가 혈연·학연 등으로 똘똘 뭉친 친일파들인 마당에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연구소의 끈질긴 노력은 철옹성 같은 친일파의 아성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등 대중 서적이 발간되면서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커져갔다. 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지지하는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은 지식인 사회가 친일청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교수사회가 본래 보수적이고 자신들의 일에도 크게 나서지 않는 경향이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이 아닌가 한다.


또 하나,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모금을 시작한 지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이 모이고 그 뒤에도 계속 성금이 답지했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듯 이를 지켜보았다. 역사는 역시 지배층이 아니라 민중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현실에서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2002년 구성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서 지도위원을 맡아 감수에 참여했다. 지도위원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저명 교수와 학자, 시민사회 원로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집필한 원고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고 의견을 내고 방향을 잡아주는 구실을 맡았다. 나는 이 회의에서 두 가지 정도를 강조했다. 하나는 철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건 상식적인 얘기 같지만, 이 상식의 바탕 위에서 서술해야 합리성과 객관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은 출세형과 생계형 친일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다시 말해 먹고살기 위해 간접적으로 친일행위를 한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나만이 아니라 편찬을 맡은 구성원들이 모두 공감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를 위한 장치를 설정했다. 우리는 결코 폭로를 위한 것도 아니요, 복수를 하자는 것도 아님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편찬위원장을 맡은 윤경로 교수(한성대)는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사에서 “사전에 수록된 개개인에게 역사의 책임을 묻고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실에 대한 정리와 역사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바로 세우고, 나아가 후대에 타산지석과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을 남기기 위한 데 있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립니다”라고 썼다.

역사학자 이이화


<한겨레>, 201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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