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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 홈피에 손기정은 없다 (서울=연합뉴스) 일제 강점시대인 1936년 열린 베를린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의 이름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http://www.olympic.org)에 일본어 발음으로 표기돼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됐다. 금메달리스트를 검색해 손기정 선생을 찾으면 사진 8장과 함께 뜨는 이름은 일본어 발음인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표기돼 있다. 사진은 IOC 홈페이지 캡처. 2011.3.3 << IOC 홈페이지 캡처 >> photo@yna.co.kr |
일제 비밀경찰 기관지 ‘특고월보’ 기록
(서울=연합뉴스) 임기창 기자 = 일제가 손기정 선수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획득을 계기로 재일(在日) 민족주의 조선인이 결집할 가능성을 우려해 환영행사를 방해한 사실이 일본 측 기록으로 확인됐다.
3일 당시 일본 특별고등경찰 기관지인 특고월보(特高月報) 1936년 10월호를 살펴보면 일본 경찰은 손 선수의 올림픽 제패로 조선인의 민족주의 정서가 크게 고양된 경향이 있다고 보고 적극 대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줄여서 `특고’라 불리는 특별고등경찰은 1911년 설치돼 1945년까지 존속한 일제의 비밀경찰로 독립운동가 등 반체제인사를 사찰, 적발하고 무자비하게 고문하면서 악명을 떨친 조직이다.
일본 경찰은 특고월보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조선유학생동창회, 신문사 관계자 등 도쿄에 있는 민족주의계 조선인들은 (손기정ㆍ남승용 선수에 대한) 대대적 환영회 개최를 도모했고 도쿄 내 각 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의 추계 육상운동회를 두 선수의 환영운동회로 만들고자 여러 가지를 획책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일경은 “민족주의 운동은 두 선수 귀국을 계기로 상당히 고조된 형세”라며 “이때 조선인만의 환영회와 위안회 등 개최를 허가한다면 민족적 감정이 높아져 일본인과 조선인 간 대립 기운을 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손기정ㆍ남승용 선수가 도쿄로 돌아왔을 때 선수 대오 맨 끝에 선 일을 두고 “일반 조선인의 접근이 쉽도록 한 듯해 일반 민족주의자의 뜻에 부합하려 한 것으로 인정되는 행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손 선수에 관해서는 당시 일본 오사카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올림픽 특파원의 말을 빌려 “독일 체류 중 외국인의 사인 요청에 `KORE(고려) 손기정’이라고 쓰는 등 불온한 행동을 했다”고 전하는 등 민족정서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기도 했다.
일본 경찰은 이와 관련, “경시청에서는 조선인만의 환영회 등은 일절 허가하지 않는 방침을 택했다”며 “도쿄 체류 조선인의 환영행사 계획은 중지시키고 각 대학 조선인 유학생의 육상운동회도 환영 분위기가 진정되고 나서 개최하도록 설득하는 등 엄중 단속해 불온 책동을 대부분 저지했다”고 활동 결과를 밝혔다.
이같은 기록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안식처 ‘나눔의 집’과 원폭 피해자 쉼터 ‘합천 평화의 집’ 원장을 맡는 등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활발히 활동하던 혜진(제주 마라도 기원정사 주지) 스님이 최근 일제 강점기 자료를 살피던 중 처음 발견했다.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당시 일본 경찰이 조선인들의 환영행사를 막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관련 기록에 관해서는 듣지 못했다”며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도 경찰이 남산에 있는 신사로 연행하다시피 데려가서 참배하게 하는 등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특고가 담당한 사안이라면 관련자들을 사상범으로 취급했다는 뜻”이라며 “조선 언론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한 차례 폭풍이 분 데다 도쿄는 일왕이 사는 곳이라는 민감성도 있는 만큼 공작과 회유, 협박을 통해 행사를 미리 봉쇄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