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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경찰로부터 카빈 총탄 10만발을 빌려달라는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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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경찰로부터 카빈 총탄 10만발을 빌려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없다고 하라’며 딱 잘라버려요.”

김운용(80·사진)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1960년 4·19 혁명 당시 군이 경찰의 실탄 제공 요청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7월20일과 9월27일 두 차례 이뤄진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터뷰에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김 전 부위원장을 비롯해 4·19 혁명 참여자 105명의 증언을 담은 ‘4월혁명 구술 아카이브’를 19일 인터넷에 공개한다.
김 전 부위원장은 4월혁명 당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의 전속 부관이었다. 연희전문대 학생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는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익힌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송 사령관의 1군사령관 시절부터 부관으로 일했다.


“(실탄 제공 거부 뒤) 며칠 후 곽영주(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자 시위대 발포명령 당사자)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무지하게 원망한다는 거야. 송 사령관이 곽영주한테 막 야단을 치더라고요. ‘정신 나간 놈들,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경찰에 총탄이 제공됐을 경우 사상자가 훨씬 늘어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송 사령관은 이기붕 전 국회의장 일가의 권총자살(28일) 사흘 전인 25일 시위대가 서대문의 이씨 집으로 몰려갔을 때 이강석 소위(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의 수차례 병력지원 요청도 거부했다고 한다. 김 전 부위원장은 “이강석이 전화가 오는데 (전화기에서) ‘와~’ 하는 데모대 소리가 들렸다. 이강석이 ‘1개 중대만 빨리 보내달라’고 해서 상황실에 전달했지만 ‘보냈다 그래’라고만 할 뿐 안 보냈다”며 “이승만 박사 사임 후 27일엔가 참모총장실로 온 이강석은 부관들하고 악수만 했다. 미안하더라”고 했다. 송 사령관의 카빈 실탄 및 중대 병력 제공 거부는 김 전 부위원장의 구술로 새롭게 밝혀진 내용들이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승만 하야(26일) 전에 계엄사령관이 경찰의 실탄 제공 요청과 군대를 통한 이강석의 이기붕 보호 시도를 거절한 게 사실이라면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증언”이라며 “향후 치밀한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19일 계엄령 선포 후 군의 첫번째 조처는 15사단을 끌고 (20일) 새벽에 (시위대가) 쫓겨 들어간 고려대로 가서 해산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박명림 교수는 당시 15사단의 시위 진압 동원에 유엔군 사령관 대행 커밍스 중장과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가 동의한 사실을 입증하는 미국 보고서를 공개한 바 있다. 미국이 4월혁명 때부터 한국군 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뜻이다. 김 전 부위원장도 “미8군이 매일 와서 군의 동향을 파악해 갔다”며 계엄령 선포 및 군대 이동에 따른 모든 사항을 미군과 협의해야 했다고 전했다.

고려대에 집결한 시위대를 계엄군이 진압하면서 한풀 꺾였던 국민의 분노가 다시 폭발한 계기는 이기붕의 23일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 발표’였다.

사퇴’가 아닌 ‘사퇴 고려’란 표현에 교수들까지 시위(25일)에 나섰다. 25일 김 전 부위원장이 “큰일 났다”고 보고하자, 사무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송 사령관은 “참모차장한테 얘기해” 하고 다시 자버렸다고 한다. “(계엄사령관이) 이미 (자유당 정권을) 포기한 것”이라고 그는 풀이했다. 송 사령관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방부 장관, 외무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과 내각 수반을 지냈다.

기념사업회 쪽은 “김 전 위원장의 구술은 좀더 고증이 필요하지만, 4월혁명 당시 군의 동태가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한겨레>, 11.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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