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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옹호’ 김대중 고문, 제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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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고 제법 긴 글을 하나 시작하려고 합니다.
다소 장황하더라도 진득하니 읽어주시길 미리 부탁드립니다.^^

우선, 저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은지가 이미 오래됐습니다.
2000년대 초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서 2년가량 미디어 담당을 했는데요,
그 때 ‘업무상’ 본 이후로는 거의 <조선일보>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내용이 실렸는지, 즉 개가 짓는지 소가 웃는지 알지 못합니다.
즐겨보는 이들도 더러 있는가 봅니다만, 저는 제 정신건강을 위해 보지 않습니다.

어제 <미디어오늘>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조선일보> 관련 기사를 하나 접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 기사의 부제에 눈길에 머물렀습니다.
부제 내용은
‘김대중 고문, 장지연 서훈 취소에 온갖 독설 총동원’.
그래서 해당 기사를 열어보았더니 19일자 [김대중칼럼]에 관한 내용이더군요.
얼핏 봐도 김씨의 칼럼에서는 몰상식한 자의 독기(毒氣)가 묻어나더군요.



19일자 <조선일보>의 ‘김대중칼럼’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김씨는 현 정부를 “철학이 없는 정부”운운하며 비판했다는데,
그 발단은 최근 국무회의에서 친일독립유공자 19명의 서훈을 취소한 때문이었습니다.
김씨는 ‘서훈 취소’를 결정한 김황식 총리 등을 두고 “무식함이 부끄럽다”고 썼다는데요,
관계당국이 전문가 심의를 거쳐 국무회의에 올라와 정상적으로 처리된 결과에 대해
김씨가 게거품을 물 듯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이유가 뭔지 저로선 자못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오랜만에 <조선일보> 인터넷판으로 들어가 문제의 [김대중칼럼]을 열었습니다.
칼럼 제목은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 하나?>였는데요,
본문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 첫머리에서 목에 가시가 걸리는 듯햇습니다.
그 첫머리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받은 몇 안 되는 언론 관계 상(賞) 중에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것이 ‘위암 장지연(張志淵)상’이다. 이제 나는 그 상을 반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게 됐다. 상(賞)의 본질은 곧 명예다. 그런데 정부가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고(故) 장지연 선생의 ‘친일(親日) 행위’를 인정하고 1962년 그에게 수여했던 건국공로훈장을 박탈함에 따라 이 상의 명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순간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휙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럼 그렇지!
김씨는 장지연의 서훈 취소 문제를 개인적 문제와 우선적으로 결부시키고 있더군요,
보기 나름으로는 자신이 ‘가장 영예롭게 여기는’ 상이 친일파를 기리는 꼴이 됐으니
인간적으로는 짜증(?)이나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 참고로 김씨는 1991년 제2회 ‘위암 장지연언론상’을 수상했습니다.)



김대중씨의 장지연언론상 수상을 보도한 기사(경향신문, 1991. 10. 30)


그래서 그가 쓴 [김대중칼럼]이라는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결론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기명캄럼을 이리도 제멋대로 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칼럼’이라는 글의 성격이 주장성, 즉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라고 백번을 양보해도
김씨의 칼럼은 논리가 편협하고 근거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김 총리를 두고 ‘무식함’ 운운했는데, 제가 보기엔 무식한 건 오히려 그더군요.

본론에 앞서 우선 논란의 핵심이 된 장지연의 공과(功過)를 아래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장지연은 친일진상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최종 ‘결정’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장지연의 친일행적 자체가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친일규명위는 ‘특별법’에 해당되는, 즉 어느 정도 일정수준 이상의 행적은 물론
그를 근거자료로 입증할 수 있는 경우에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합니다.

친일규명위의 ‘결정’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우선 1차로 각 분야별로 조사대상자를 선정하는데, 그 대상자는 상당히 방대합니다.
이어 조사대상자들의 친일행적을 입증할만한 근거자료를 찾고 또 이를 등급별로 나눕니다.
이 과정에서 질적, 양적으로 친일혐의가 미약한 자는 탈락시킵니다.
예를 들어 친일시 1편을 남긴 가람 이병기 같은 경우엔 대상자에서 빠졌습니다.
(* 참고로 저는 친일규명위에서 실무책임자인 사무처장을 지냇습니다.)

조사대상자가 걸러지면 3부에서 추천한 11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자체 선정한 후,
이를 당사자(혹은 유족 등)에게 연락하여 이의신청을 받은 후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다시 말해 법규에 의거하여 위원회 내부적으로 거르고 또 당사자의 반론도 받습니다.
문제의 장지연의 경우 유족의 ‘이의신청’이 받아들여져 최종 결정에서 빠진 경우입니다.
따라서 얼핏 보면 장지연은 친일혐의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말하자면 ‘등급 미달’일 뿐 친일행적 자체가 없거나 사라진 건 결코 아닙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같은 경우이나 그의 친일혐의가 없어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위암 장지연



[위암 장지연의 항일활동 및 친일행적]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구한말 항일애국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취지로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구속돼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 이 일로 그는 항일언론인의 표상으로 불려 왔고, 기념사업회와 기념상이 제정됐습니다.)

이후 장지연은 대한자강회 발기인과 평의원 및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로 언론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해조신문> 주필을 그만둔 후에는 중국을 거쳐 귀국하여 대한협회의 평의원을 지냈으며,
1909년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이 돼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이같은 항일언론활동 공적으로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이상이 장지연의 애국적 면모라면, 아래는 그의 확인된 친일행적들입니다.
한편, 장지연의 항일 언론활동은 1910년 ‘한일합병’, 즉 국권상실 이후 막을 내립니다.
장지연은 1914년 12월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고정 필자로서,
다시 이듬해 1915년부터는 매일신보사 시회(詩會)의 회원으로서 활동하면서
적어도 1918년 12월까지 일제 식민통치를 찬양, 협력하는 글을 다수 발표하였습니다.
한 때 항일언론인의 표상이었던 그가 180도 자세를 바꿔 친일인사가 된 것입니다.

한 두 가지 구체적인 친일문장을 쓴 사례를 들어볼까요?

1915년 9월, 총독부가 한일병합 5주년을 맞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는 일제가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발전상을 내외에 널리 선전하는 한편
나아가 ‘일선인(日鮮人) 융화’를 도모코자 한 사실상의 정치적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장지연은 “공전한후(空前罕後)의 일대성회(一大盛會)”라며 이를 극찬하고는
조선인들이 적극 이 행사에 참관할 것을 선동, 독려하고 나섰습니다.

이 행사가 끝나자 그는 본격적으로 일제통치를 고무, 찬양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산업개발지급무(産業開發之急務) 25’라는 논설을 통해
한일병합 후 5년간 조선의 산업이 “진보한 성적”을 거두었고, “두드러지게 증진된 상황”에
달했다며 일제의 조선 지배를 아예 대놓고 찬양하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일제로 하여금 “목하의 성적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독칙(督飭)하며 장려와 지도와 개발에 여력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더욱 강도 높은 식민통치를 촉구했습니다.
이미 여기서 우리가 알았던 예전의 항일언론인 장지연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장지연은 또 일제의 천황제와 아시아침략 정책을 극구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만필쇄어(5)-신무천황제’라는 글에서는 일본 천황제의 ‘만세일계(萬世一系)’를 기원하며
이를 ‘세계 만국에 없는 바’라더니 “일본이 실제 동양의 패왕”이라며 극찬하였습니다.
또 일본을 동양의 선각자로 인식하고는 “뛰어난 전술로 마침내 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으니, 동양의 독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찌 지나친 말이겠는가!”(‘만필쇄어(17)-신구학’)라며
일제의 아시아 침략을 칭송하고 한껏 당위성을 펼쳤습니다.
이는 마치 일제 군국주의의 글이 아닌 지 착각이 들게 할 정도입니다.

이밖에도 그는 1915년 1월부터 한시(漢詩)를 지어 일제를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친일 조선인들로 구성된 매일신보사 시회(詩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한시를 여럿 지어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1916년 12월 하세가와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자 그는 환영시를 지어 바쳤으며,
또 1917년 6월 영친왕의 일본 육사졸업을 계기로 순종이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가자 이를 두고
“일선융화(日鮮融化)의 서광(曙光)”(‘대정육년시사’)라며 호들갑을 떨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의 이런 친일성향의 글이 한두 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는 1914~1918년 사이에 <매일신보>에 무려 700여 편의 논설 등을 실었습니다.
물론 그의 유족은 이의신청을 통해 ‘친일이 아니다’고 반론을 편 것으로 압니다.
유족들이 반론을 펼 자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팩트(fact) 자체가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규명위측은 장지연의 친일행위가 특별법을 엄격히 적용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결론짓고 조사대상자 선정에서 최종 제외한 것으로 압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로써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면죄부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김씨의 칼럼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 반박해볼까 합니다.
우선 아래에 링크된 ‘[김대중칼럼] 전문보기’를 통해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김대중칼럼 전문보기 :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 하나?]

우선, 첫째로 김씨의 칼럼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공과론’입니다.
말하자면 공(功)이 있는 경우 어느 정도의 과(課)는 용인할 수 있다는 대목입니다.
김씨는 칼럼에서 장지연의 공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장지연 선생이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 한 편만으로도 그분은 당대에 남을 항일지사였고 민족언론인이었음을 그 글의 맥박을 짚어 증언할 수 있다.”

김씨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성장을 시켰으니 독재 정도는 괜찮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집권기간에 물가를 잡았으니 그 역시 독재 정도는 괜찮다는 얘기군요.
그렇다면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간부로 활동하면서 잠시나마 ‘애국활동’을 한 일도 있고,
이광수도 임정에서 <독립신문> 편집책임자를 했으니 말년의 친일은 괜찮다는 얘긴가요?
대체 김씨는 어떻게 이런 해괴한 논리를 공적 매체인 신문에 쓸 생각을 했을까요?

둘째, ‘민간단체가 이런저런 의견’을 냈으니 무시해도 된다는 식의 발상입니다.
이번에 국무회의에서 장지연 등 친일경력자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 결정은
그 발단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서 시작됐습니다.
독립유공자 서훈 주무부서인 보훈처는 인명사전에 실린 장지연 등의 친일행적을 토대로
보훈처 산하 서훈심사위원회에서 심의한 후 이를 국무회의에 넘긴 것입니다.

훈장 수여 및 취소는 대통령의 고유권한인데 국무회의를 거치도록 돼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국무회의는 보훈처 전문가들의 심의 결과를 수용한 것뿐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서훈 취소 문제 같은 것은 보훈처 자체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안입니다.
보훈처가 부적격자에게 훈장을 줬으면 원인제공자인 보훈처가 결자해지 했어야지요.
그런데 제 손으로 머리 못깎으니까 시만단체에서 당국이 할 일을 도와준 거 아닙니까?

그랬으면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민간단체’ 운운이라니요?
만약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보수성향의 단체였대도 김씨가 ‘민간단체’ 운운했을까요?
서훈심사위와 국무회의가 장지연 등 19명의 서훈 박탈을 의결한 걸 두고서 김씨는
“한마디로 멍청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아니면 좌파적”이라고 극한적인 비방을 폈는데,
당국이 ‘민간단체의 의견’은 전부 무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요?
(* 조만간 김씨가 민간단체의 의견을 인용해 주장한 글들을 조사해볼 참입니다.)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친일규명위 간판 및 로고


셋째, 1962년 서훈 때와 2005년 친일규명위 심사 때 밝혀졌다는 부분입니다.
우선 장지연이 훈장을 추서받은 1962년 당시에는 제대로 된 심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확인한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변절 여부’라는 항목이 별도로 있었습니다.
1962년 당시 제대로 된 심사, 즉 엄격한 자료조사 및 증언채취를 했더라면
그 때 장지연에게는 건국훈장 추서 자체가 아마 이뤄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난 1996년에 1차로 5명의 서훈이 취소된 것이나 이번에 2차로 19명이 취소된 것은
모두 과거에 공적조사 및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5년에 친일규명위의 조사 건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친일규명위의 결정은 장지연이 친일행적이 전무하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
특별법에서 규정한 일정한 수준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친일의 정도를 1~10으로 볼 때 특별법에서는 ‘8 이상’을 대상자로 했을 경우
장지연은 그 아래 수준인 7이나 6, 또는 그 이하였다는 얘기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마치 장지연이 무혐의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언론인의 옳은 자세가 아니지요.

넷째, ‘서훈 취소 그 이후’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김씨는 이런 걱정을 늘어놓고 있군요. 한번 구경하십시오.

“장지연상이 작년까지 21회 수여됐으니 이 상을 받은 20인 이상의 언론인과 20여명 한국학 교수 등의 ‘명예’도 땅에 떨어진 셈이다. 이분들 역시 상의 무게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장지연 선생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오늘에 이르러 목 놓아 크게 통곡함)’이라는 논설을 항일언론의 상징으로 배워온 세대와 그렇게 기술한 교과서, 역사책, 기념비석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존 장지연상 수상자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대체 그게 무슨 얘긴가요?
장지연이 항일언론인으로 추앙받던 시절에 받은 상이라면 수상자들이 무슨 문제인가요?
아직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김씨 혼자서 웬 호들갑이죠?
그리고 장지연을 항일언론인으로 묘사한 교과서, 역사책, 기념비는 또 웬 걱정이죠?
긴말 할 것 없이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면 그만입니다.

즉 ‘장지연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는 이를 반대하는 항일 논설을 썼으나
이후엔 변절하여 총독부 기관지에 일제를 찬양하는 친일논설을 썼다’고 쓰면 되잖아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이게 김씨 같은 사람들이 흔히 주장하는 공과를 균형있게 기록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기념비석은 내용에 문제가 있으면 고치거나 아니면 아예 헐어버리던가요.



지난 1967년 ‘한국언론인 일동’ 명의로 당시 언론인들이 세운 묘비




경남 마산 현동에 소재한 장지연 부부의 묘소


다섯째, 김씨가 김황식 총리 등을 향해 쏜 화살을 그에게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그는 칼럼에서 이런 내용도 썼더군요. 다시 인용문을 같이 보시죠.

“나는 서훈취소를 의결한 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묻고 싶다. 아니 그가 지방언론에 썼다는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 김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독립운동 공로도 인정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서훈취소가 마땅하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나는 김 총리가 말을 거꾸로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그는 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다.”

김씨의 지적대로 김 총리나 그날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각료들 가운데 상당수는
어쩌면 ‘시일야방성대곡’을 미처 읽어보지 못했을 수 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김씨는 이를 오래전에 읽어봤을까요?
전적으로 제 개인생각입니다만,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봅니다.
결국 김 총리 등이나 김씨나 시일야방성대곡을 굳이 읽었어야할 필연적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역으로 김씨는 장지연의 친일행적 관련 기사나 자료를 제대로 봤을까요?
즉, 앞에서 제가 언급한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기는 했을까요?
모르고 있었다면 그는 김 총리 등을 따지고 들 자격이 없는 셈이구요,
반대로 만약 그가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친일파 아류’ 정도 되는 셈이죠.,
즉 장지연이 일제의 조선통치 및 침략정책을 찬양한 친일논설 등을 쓴 사실을 알고서도
장지연을 항일언론인으로 고집했다면 그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서서히 이 글을 마무리할 차례입니다.
그들 말로는 100만부가 넘게 나간다는, 소위 ‘조중동’ 중 한 매체의 고문이라는 사람이,
버젓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기명칼럼에서 논리도, 근거도 없이 사적(私的) 인연을 앞세워
팩트로 확인된 역사적 진실을 호도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런 사람을 원로언론인으로 대접하고 있는 우리 언론계 현실도 한심하군요.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리고 1면에 일황 부부 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1936년 1월 1일자 신년호



비록 김씨보다 뒤에 태어났고 연륜도 짧지만 저는 똥과 된장을 가릴 줄은 압니다.
대체 세상에 어디 비호할 게 없어서 ‘친일’을 다 비호합니까?
적으나 양심이 있다면 <조선일보> 종업원인 김씨 같은 사람은 침묵하는 게 옳았습니다.
그가 적으나 원로언론인으로서 밥값을 하자면 비호가 아니라 ‘탄식’을 했어야지요.
아니, ‘항일언론인 장지연’의 변절에 대해 깊은 ‘유감(有感)’을 표명했어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마지막 대목을 보면 그는 너무도 딴 세상 사람 같군요.
앞에서는 “나는 ‘친일인사를 기려서’ 만든 상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어졌다.”더니
‘멍청한 정부’ 탓에 개인적으로는 가장 존경하는 언론인 대선배의 명예가 더럽혀졌지만
자신은 그래도 장지연 상을 자랑으로 간직하고자 한다고 금세 입장을 바꿨네요?
간직하고 말고는 김씨의 자유니 그건 김씨가 알아서 하면 되구요,
장지연 상이 그렇게 자랑거리라니 김씨 집안의 가보(家寶)로 물리면 어떨까 싶네요?

긴 글 읽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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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저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김씨가 적극적으로 반박해오기를 기대하며,
만약 공개토론을 요구할 경우 시간, 장소 불문하고 응할 것임을 밝혀둡니다.)


 


정운현님의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78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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