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본 교토 인근에서 태어난 서승 교수는 한국 유학 중이던 1971년 보안사에 연행돼 고문 끝에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로 조작되어 그해 10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90년 19년 만에 석방되었다. 1974년 국제앰네스티가 선정한 그해의 양심수였으며, 한국 정부가 석방시킨 최초의 ‘비전향 정치범’이었다. 2006년부터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작은 사진은 서승 교수가 서울대로 유학 올 무렵인 1968년 전후에 찍은 모습이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A
재일동포 인권평화운동가 서승 교수(리쓰메이칸대)가 올해로 정년을 맞았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 서울의 지인들은 지난 3월26일 옛 안기부 청사가 있던 남산 유스호스텔 강당에서 그의 퇴임 기념식을 열어주었다. 일본에서도 일본인 지인들이 주관한 기념행사가 교토와 오키나와에서 열린 데 이어 4월23일 도쿄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의 여러 학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그의 정년퇴임을 축하했다.
서 교수는 1974년 국제앰네스티가 선정한 ‘세계의 양심수’였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제3세계 민중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 뒤 사상 전향 공작에 맞서 장장 19년을 옥중에서 버텨낸 의지의 소유자이지만, 스스로 위악을 가장하면서까지 영웅이기를 거부했다. 97년 일본 교토의 리쓰메이칸대학에서 ‘반일론’을 강의하다가 정식 교수가 된 그는 이후 과거 일본이 지배했던 한국과 대만, 오키나와를 오가며 “일본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일이야말로 동아시아 지역의 최대 인권 및 평화운동”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정년 기념문집에 보니 오키나와에선 선생을 ‘우후카지’라고 부른다면서요?
“우후카지는 오키나와 말로 대풍, 큰바람이란 말입니다. 거기 활동가들이 제가 하도 무섭게 일을 벌이고 설쳐대니까, 제가 나타나면 ‘저기 우후카지 온다’ 하고 도망쳤어요. 사실 내가 한번 꽂히면 정신없이 일을 벌이니 주변 사람들이 무척 힘들어하기도 하고 겁을 내기도 하고 그래요.(웃음) 성질이 좀 급하고 못됐죠, 제가.”
그는 기념문집에서 어린 시절은 악동으로, 성장기는 민족의식에 눈뜨고 재일동포 사회와 조국의 모순에 분노하는 정의감과 사명감 넘치는 청년으로, 출옥 후에는 영웅이 아닌 본래의 자신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던 파괴적인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서승 교수(이하 서승)는 1945년 4월3일 일본 교토 인근의 슈잔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충남 청양 출신인 그의 할아버지는 1928년 일제의 수탈에 내몰려 가족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외할아버지는 공주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역도산을 좋아해 레슬링 한다며 동생들을 꽤 괴롭혔지요. 성질 급하고 화 잘 내고.”
-해방되기 넉달 전에 태어나셨더군요.
“아버지가 징용을 피해 숨어다닐 때였습니다. 가장이 집에 없으니 온 가족이 초근목피로 연명했어요. 어머니가 젖이 나오지 않아 싸라기와 볶은 콩을 씹은 물을 내 입에 흘려넣어 주었지만 소화를 못 시켜 거의 죽기 직전이었는데 일본이 망한 겁니다. 도망을 다니다 몰래 집에 돌아와 김을 매던 아버지는 일본의 패전 소식에 어머니를 부여안고 논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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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돼 감옥서 분신 기도
“한국민주화 투쟁하던 옥중동지들이 나의 힘”
인권운동 인정받아 학위없이 일본서 교수직에
-민족의식 또는 모국이란 관념은 언제 생겨났나요?
“조선인이라는 자의식은 유치원 때부터 싹텄습니다. 아이들과 싸우면 ‘조센’이라는 욕을 들었으니 내가 조선인이란 걸 일본 아이한테 배운 셈이죠. 소학교에 들어가서는 숙제 못 해 오는 애들, 학비 안 가져와 혼나는 애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인 게 부끄러웠는데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나는 누구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분명한 것은 일본말을 쓰고 일본 음식을 먹지만 일본인은 아니라는 거였지요.”
서승이 중3일 때 한국에서는 4·19 혁명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학생 청년들 200여명이 시위를 벌이다 총에 맞아 숨졌다. 이 사건은 서승의 자아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한국의 중학생들이 왜 총부리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시위를 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 그는 자연스레 남북 분단, 반공주의에 기반한 군부독재 등 한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의문을 키워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반일의식도 강해져서 학교에서도 일본이란 주제가 들어가는 선택과목은 일절 수강하지 않을 정도였다.
-한국에 처음 간 것은 언제인가요?
“1964년 도쿄교대 1학년 때 재일한국인학생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문했지요. 우리 가족 중에 한국에 간 것은 내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한창이어서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학생시위를 체험하고, 외할아버지의 고향도 방문했습니다. 그때 체험이 내가 왜 한국인인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서승은 1968년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유학을 왔다. 유학의 가장 큰 목적은 한국어 습득이었다. 한국인으로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말을 못한다는 것에 서승은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은 한국어 공부에서 나아가 한국 학생들이 지고 있는 반독재 투쟁의 짐을 함께 지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선생이 보안사에 연행된 것이 1971년인데 대통령선거가 있었을 때였지요?
“방학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김포공항에서 체포돼 보안사로 연행됐습니다. 나중에 이른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돼 동생(서준식 전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형과 함께 사상 전향을 거부해 1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도 잡혀갔고. 잡혀가서 보니 박정희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시 야당 김대중 후보에게 북한의 선거자금을 전달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했지요.”
서승은 보안사 조사실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난로의 경유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조사관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죽을 작정이었으나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오는 바람에 발각돼 병원으로 이송됐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재판정에 서서 사형 구형을 받던 그의 사진은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진 고문과 분신, 19년의 옥살이… 대단한 의지력의 소유자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런 상황을 극복했는지 궁금합니다.
“태어나서 3번 정도 크게 죽을 고비가 있었죠. 굶주림, 분신, 사형… 하지만 내가 의지력이 강해서 지금껏 살아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담배도 못 끊는 성격인데요 뭐.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적시에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헌신과 가족들, 나의 석방과 건강을 위해 애써준 전세계의 많은 분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겁니다. 감옥살이 오래 한 덕분에 학위도 없이 대학교수까지 되었고.”
-옥중 체험을 엮은 <옥중 19년-한국 정치범의 투쟁>(이와나미신서)이 일본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나의 감옥살이는 한마디로 사상 전향 공작과의 투쟁이었습니다. 나는 감옥 갈 때 막 대학원을 마친 성질 나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대단한 혁명가도 아니고, 이념가는 더더욱 아니었구요. 하지만 사람의 생각을 강제로 바꾸고 힘으로 굴복시켜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그런 비인간적인 제도에 결코 굴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사상 전향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잔재가 아니었던가요?”
-한국은 재일동포 3세인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얼굴을 빼앗고, 19년의 청춘을 압수했습니다. 한국이란 나라에 원한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요.
“군사독재나 국가폭력이라면 몰라도, 아닙니다. 나는 옥살이를 통해 한국을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조국을 위해,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들과 지내면서 내가 한국이란 나라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기쁨도 느껴보았습니다. 일본에서의 차별은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한국 사회와 역사에 참여하고자 한다면 나는 기꺼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19년은 너무 잔인했습니다. 내가 다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감옥은 지극히 좁은 세상이지만 아마도 가장 자유로운 세상일 겁니다. 더이상 갈 데가 없으니 무슨 이야기든 다 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한국 민주화의 중요한 이슈를 가지고 함께 투쟁하면서 맺은 인간관계가 나를 넓고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으니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겠지요. 대학교수가 되어 이런저런 활동을 한·일 양쪽에서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옥중 동지들이 나의 힘이요 기반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교토의 한 별볼일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옥중에서 보낸 19년의 세월은 물론 아까운 시간이었지만, 결코 무익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역사와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한국말을 잘하게 된 것도 모두 감옥살이 덕분이구요.(웃음)”
-어머니 오기순씨도 대단한 분이셨지요?
“내가 감옥에서 어려울 때마다 어머니가 면회를 오셔서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무학자였으나 나와 동생의 면회를 다니기 위해 50 나이에 글을 배웠지요. 면회를 오셔서는 늘 ‘마음 강하게 먹어라, 의롭지 못한 인간들에게 결코 굴복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보통 어머니들과는 좀 다르셨지요.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동안 50번이나 일본에서 한국 교도소로 면회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광주항쟁 나던 1980년 5월19일 돌아가셨습니다. 자궁암이셨는데 동맥류가 터지는 바람에 피바다 속에서 가셨습니다. 감옥에서 광주항쟁 소식과 부음을 같이 들었습니다. 피바다 속의 죽음은 어머니나 저에게 모두 상징적인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서승은 옥중에서 부모를 모두 여의고 10년이 더 지나서야 석방되었다. 그의 석방운동은 일본 앰네스티를 중심으로 전세계로 퍼지고 한국에서도 6월항쟁을 거쳐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당시 노태우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로는 예외적으로 서승의 석방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특사로 나와 1994년부터 리쓰메이칸대학 강단에 섰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내 석방운동을 도운 분들의 요청으로 2년간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일본에 가서 화상으로 굽은 손을 펴고 안경을 걸기 위해 귀를 고치는 성형수술을 1년 정도 받았습니다. 그게 93년인데, 내 석방운동을 한 일본 변호사 한 분이 교토의 리쓰메이칸대 법학부에 나를 소개했습니다. 인권운동가로서 법학생들에게 내 투쟁 체험을 소개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치안법과 인권’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하다가 문학부에서도 초청해 ‘반일론’이란 제목으로 강의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일본 대학에서 재일동포에게 ‘반일론’을 강의하라니, 놀랍군요. 정식으로 법학부 교수가 된 건 1998년이었습니다.
“임용 과정이 좀 재미있습니다. 당시 나는 석사학위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법학 전공도 아니었구요. 그런데도 학교 인사위원회에서 내 인권운동과 <옥중 19년> 등을 평가해 조교수로 임용하기로 하고 대학교수회의에 승인을 요청했는데 교수회의에서 조교수 임용을 부결시키고 학교 쪽에 정교수 임명을 요청한 겁니다. 서승이 나이 55살인데 7년 뒤에 정교수가 되어도 곧 정년이니 바로 정교수로 임용하라고. 그렇게 해서 나는 학위도 없는 몸으로 바로 정교수가 되었는데, 이런 사례는 아마 일본에서도 처음이자 마지막 파격이었을 겁니다.”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한데, 오히려 일본에서 석방운동이 일어났고, 교수도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남다른 감정을 갖고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한국, 대만, 오키나와, 중국 등에서 식민지배와 국가폭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야스쿠니 신사 폐지운동을 벌이는 목적은 어떻게 하면 일본을 제압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일본을 제압한다?
“일본을 제압한다는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아시아의 침략자, 억압자로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해 일본을 참된 평화와 민주주의 나라로 거듭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정부에 식민지배의 책임을 묻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됩니다. 이게 자랑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본 인터넷상에 일부 일본인들이 지목한 매국노가 20~30명 있는데 내가 거기에 B급 매국노로 끼여 있지요. 그 사람들이 알고도 그랬는지, 외국 사람은 나 하나뿐이더군요.(웃음)”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합사 반대운동도 그런 일환이겠지요?
“야스쿠니는 신사가 아니라 명백한 군사시설입니다. 정부 예산으로 운영되고 유족에게도 나라가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야스쿠니를 통해 대동아전쟁을 기리고 있는 한 일본의 군국주의는 아직 해체된 게 아닙니다. 야스쿠니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분들도 함께 고생 많이 했는데 형제분들 얘기도 해줄 수 있나요?
“나야 할 수는 있는데 본인이 원하지 않을 수 있어요. 경식이는 <한겨레>에 글을 쓰고 있으니 다 알 거고, 준식이는 요즘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어하는데, 굳이 내가 나서서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퇴임식에는 조카딸이 와서 꽃다발을 주어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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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대만서 식민지배·국가폭력 고발 앞장
일본에 책임묻는 것이 최대 인권·평화운동
“더 늦기전 동아시아 문제 책으로 쓰고싶다”
-앞으로 계획은?
“더 늦기 전에 동아시아 문제에 관한 내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쓰고 싶습니다. 학교 강의는 특임교수로 계속할 것이고, 올가을 할 예정인 ‘동아시아 역사·인권·평화 선언’ 발표가 계획대로 진행됐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은?
“아내는 일본에서 교사를 하고 있고, 쌍둥이 딸들이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걱정이지요, 월급이 반으로 줄었으니, 허허.”
서승이 말하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은 일본 식민지배의 완전한 청산과 미·일 중심의 냉전체제에서 발생한 국가폭력에 대한 책임과 보상이 없이는 달성되지 않는다. 그의 이런 주장은 노예제나 인종대학살처럼 식민지배 자체를 국제법상 범죄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는 한국과 일본, 대만과 오키나와 학자 및 운동가들을 모아 추진하고 있는 ‘동아시아 역사·인권·평화 선언’에 이런 자신의 이상을 담고 싶어한다.
<한겨레신문> , 11.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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