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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재산환수 반대해요, 제 유산이 줄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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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대학 생활은 가진 것도 없는 내게는 추억꺼리가 없다. 사회인으로 세상에 나오던 날, 꿈도 있고 지향하는 인생도 있어 얼마나 포부에 부풀었던가. 하지만 취직은 낙방의 연속이었다. 당시 취직 서류의 제1조건은 신원증명서다. 아버지 납북에 연좌되어 첫 번째 조건이 나는 없다. 신원증명서는 내 꿈을 산산이 찢어놓고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방향을 잃은 나는 다시 정처 없이 고행 길을 걸어야 했다.” (책 속에서)


 


항일 독립지사,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 워원장을 지냈던 김상덕의 아들이 겪은 일이다. 독립운동과 친일파 처벌 활동이란 경력은 묻혀버리고 ‘납북자의 아들’이란 신원증명만 남아 취업 길을 가로막았다.


 













<김상덕 평전>에서 이 대목을 읽던 중 문득 예전에 근무하던 학교 수업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하고 있을 때 돌발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다. 토론식 수업이었는데 한 녀석이 손을 들고 자신은 친일파 재산 환수는 반대한다고 했다. 이유를 물어본 즉 자기 할아버지가 친일파가 분명한데 친일파의 재산을 환수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정작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 보면서 속에서 불끈 화가 치밀었지만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친일 문제는 개인의 이해관계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면서 토론 주제를 다른 쪽으로 유도했다.


 


돌아보면 안타까운 수업이었다. 친일파와 친일파 후손 문제를 토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은 후손들이 사회 곳곳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지금,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걸까. 친일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친일 문제는 그렇게 묻혀버리고 말아야 할까. 그 무렵 <김상덕 평전>이 있었더라면 재산 환수에 반대한다던 녀석과 함께 읽고 이야기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친일파 후손엔 면죄부, 독립운동가 후손에겐 연좌죄


 


<김상덕 평전>을 읽으면서 가슴 저렸던 건 후손들의 참혹한 삶 때문이었다. 낯선 중국 땅에서  김상덕의 아내는 약도 변변히 써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아내를 잃은 지 채 일 년도 못 되어 딸이 영양실조로 죽었다. 독립운동에 매달려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상황이 빚은 비극이었다.그래도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김상덕은 남은 두 남매를 고아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고아원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남매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해방이 되어도 후손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반민특위 위원장이란 부친의 경력이 낙인이 되어 취업을 가로막았다. 1894년 폐지된 연좌법이 해방 후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에게 노비문서처럼 따라다녔다.


 









김상덕은 어떤 사람일까?

1919년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의 실행위원으로 선언을 주도했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학을 중퇴하고 1920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겨 북만주 한국독립당에 참여, 무장투쟁을 지도했다. 1933년 난징으로 가서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 간부로 활동했다. 1942년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에 당선되어 임시정부 헌법수개정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임시정부 문화부장에 선임되어 국무위원으로 내각에 참여하던 중 해방을 맞아 27년 만에 귀국했다. 1946년 과도 입법의원에 당선되고, 1947년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48년 5.10 총선에 출마, 경북 고령에서 당선되어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반민특위위원장에 선출되어 친일잔재 청산에 헌신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956년 4월 28일 평양에서 별세했다. 1958년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안장되었고,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상덕 선생의 아들 김정륙씨의 신산했던 삶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는 ‘공정사회’ 따위의 공염불에 하염없는 분노를 삼켜야 했습니다. 독립운동가 ? 반민특위위원장의 아들이라고 이력서에 쓰면 받아주지 않았다는 회사의 사회의, 그래서 일용노동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한 맺힌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어찌 그뿐일까요. 언제쯤이면 올바른 생각,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대접받고, 그런 사람들이 주류가 되는 세상이 올까요. 부질없는 기대일까요.” (책 속에서)


 


친일파의 후손들은 어떠했는가. 해방 후 좌우 대립 속에서 친일이란 굴레를 벗고 반공투사로 독재 권력의 추종자로 변신해서 독립운동가들을 좌익으로 몰아 탄압했다. 그 떡고물을 받아먹고 자란 후손들은 부와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렇게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이용해서 선대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고 면죄부를 부여했다.


 


친일파 후손들에까지 친일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선대의 친일 경력의 떡고물을 먹고 자란 그들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은폐하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선대의 친일 행위가 잘못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평생을 민족독립 쟁취와 민족정기 정립에 바친 애국지사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기록물 하나 없었던 김상덕, 그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 <김상덕 평전>이 출간되었다. 치열한 독립운동가로 살아간 김상덕과 더불어 고난의 역정을 함께한 아들 김정륙의 생생한 증언이 갈피갈피마다 담겨 독자들의 가슴을 울려준다.


<오마이뉴스>, 201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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